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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실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처음 실감했던 순간이란,


 대학에 입학하고 카페에 가서 이국의 이름을 띈 카페의 메뉴 가운데 나에게 적당한 뭔가를 선택할 수 있었을 때, 화장품을 얼굴에 찍어 바르고 전과 다른 어떤 상승의 분위기를 풍기며 거리를 걷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착각?!) 할 때, 과외를 하며 과외비를 빌어서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다는 실감 하며 자립심을 느끼는 순간. 등등


 여러 순간들이 있었다.


 과거에는 이런 순간들 속에서 어른이 된 기분을 맛보았던 것도 같다.


 지금은 도저히 통제가 되지 않은 어리고 서툴고 변덕스럽고 울퉁불퉁해서 이리저리 찔리고 찌르는 아이의 마음을 넉넉히 받아주고 그것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는 나를 볼 때,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상처로 되받아치지 않는 나를 발견할 때, 그럴 때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된 것을 실감한다.



 이런 능력은 한 번에 발생하지 않고 오랜 수행과 시행착오를 통해 성립한다. 또 어떤 때는 할 수 있었다가도 어떤 사정에 의해 퇴행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돌봐줄 수 있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과정들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능력과 타인을 돌보는 능력을 내내 길러가며 아이에서 어른이 되고, 어른에서 진짜 어른이 되고, 또 어른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가도 어른 아이가 되기도 한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마음속 어린이를 어르고 달래 가며 어른으로 버티기 힘들 때조차 어른으로 꼿꼿이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위로가 필요한 아이를 발견했을 때, 위로를 필요로 하는 아이가 나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그것을 상처로 되받아치지 않고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 아이를 돌보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속 자라지 못해서 미숙한 아이를 돌보는 것, 그렇게 한 뼘씩, 한 걸음씩 나아가며 일상의 크고 작은 고비를 ‘함께’ 넘겨 가는 것, 그 속에 사랑이 있고 회복이 있고 성숙이 있다.


 결국 내가 아이를 위로한다는 것은 엄마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어른이기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른이 된 나는, 아이들을 돌보며 또 그러면서 내 안의 아직 덜 자란 아이를 돌보며, 그렇게 매일 자라는 사람이다.



키운다는 것이

키워낸다는 것이

주어와 목적어가 뒤섞이는 일인 줄

너를 만나기 전엔 몰랐네


너를 키우며 나는

또 한 번의 유년을 지나게 되네


나는 너를 키우며

너의 나를 키우며

나의 너를 키우며

비로소 내가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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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9-17 10:56:50
  • 수정 2021-09-17 1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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