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노르웨이의 숲」 그 속에 나타난 현대인의 고독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고찰
  • 기사등록 2021-04-05 13:16:54
기사수정


[The Psychology Times=이서진 ]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베스트셀러 「노르웨이의 숲」



하루키의 첫 베스트셀러인 <노르웨이의 숲>은 아리송하게도 본래 작가의 스타일과 전혀 다른 종류의 소설이라고 한다. 포스트모던을 추구하는 작가인 그가 전형적인 리얼리즘 소설을 쓴 것은 스스로에게도 큰 도전이었다고 한다. <노르웨이의 숲>은 현대인의 상실감과 고독감을 잘 드러내는 리얼리즘 소설이다. 


작가 본인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연애소설로 분류되지만, 일부 사람들이 ‘자살소설’로 부를 만큼 자의적 죽음을 택하는 등장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이자 주목할 현상 중 하나인 높은 자살이 중요하게 다뤄지는칸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죽음에 대한 고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설이다. 최근에 외로움과 공허감을 짙게 느끼고 있는 이들이라면 해당 소설을 읽은 뒤 가볍게 필자의 칼럼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2. 죽음에 대한 고찰



‘삶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 <노르웨이의 숲> 中


책 속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은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해결책을 마련하기보다는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고자 했던 경향을 보인다. 즉, 자신이 규정지은 완벽함을 과도하게 추구한 나머지 타인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도움을 청하는 방법조차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를 고립시키다 좌절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나오코의 친언니의 모습을 통해 부각되는데 그녀는 남에게 마음의 짐을 나누지 못했고 가족들 역시 그녀를 그저 완벼한 사람으로 여겨 방치하다 죽음을 막지 못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와타나베는 절친 기즈키가 자살한 날을 기점으로 죽음이라는 존재를 온전히 느끼며 살아간다. 책을 읽다 보면 “왜 이렇게 다들 죽는 거야?”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절친 기즈키, 사랑하는 나오코, 나오코의 친언니, 나가사와의 연인 하쓰미가 자살했고, 미도리의 아버지는 병으로 죽었다. 소수의 인물을 제외한 대부분은 병이나 타의적 주음이 아닌 자의적 죽음을 택하였다. 이로 인해 소설 주인공 와타나배는 죽음이 내 삶의 끝에 있는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존재하는 생생한 존재임을 깨닫고 살아간다. 와타나베처럼 죽음이라는 단어를 '체감'한 사람은 다시는 죽음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이 나의 일이라는 것에 확신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세계는 삶, 활력, 희망이 아닌 ‘죽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작가는 와타나베라는 인물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단순히 죽음을 비극이나 아픔으로 비추기보단, 죽음이 삶의 일부라고 계속 이야기해준다. 


이런 점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죽음에 대한 여러 시사점을 제시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이 세상을 떠날 때 나는 그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특히나 그 죽음이 그 사람의 선택, 즉 자살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주인공 와타나베는 많은 죽음을 경험했다. 그는 본래 사람을 많이 사귀고 활발한 성격이 아닌데 그렇다고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내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1~10장 동안 슬픔, 절망, 자살에 대한 원망, 두려움을 겉으로 아주 드러내지도,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도 않는다. 11장에 도착해서야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크나큰 상실을 마음에 안고서 부랑자가 되어 떠도는 것이다. 그런데도 독자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와타나베의 심리적 상태를 아주 잘 느낄 수 있다. 그는 계속 절망했고, 불안했고, 기즈키가 있는 세계, 죽음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청춘의 방황과 고통



엔딩 장면, 와타나베는 부랑자로 방황하다 도쿄의 도심 한가운데에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한다.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물었다. “너 지금 어디니?”.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와타나베는 마음을 잃고서, 삶의 목적을 잃고서 이곳저곳 방황하다가 결국 자신에게 생기가 되어주었던 여자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모조리 혼란스러워한다. 와타나베는 더이상 와타나베가 아닐지 모른다. 그를 그답게 존재하게 했던 나오코도, 기즈키도 없는 세상에서 와타나베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힘이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모두 이러한 순간이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나는 여태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나는 왜 살아가는지, 나는 왜 죽을 용기가 없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정답이라곤 없는 의문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순간이 누구나 온다. 필자도 그래보았기에 와타나베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와타나배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것이다. 자신의 절친 기즈키왕 사랑하는 연인 나오코가 있는 죽음의 세계를 선택할지, 그 누구도 남지 않은 어렵고도 삭막한 현실세계에서 상실감을 느끼며 살아갈지. 우리는 마냥 와타나베에게 ‘죽은 사람은 이미 없을 뿐이야. 너는 너의 삶을 살아.’라고 조언할 수가 없다. 죽음에 대해 우린 더 신중해야 한다. 과연 이 칼럼을 읽는 여러분은 와타나베가 어떤 선택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4. 아픈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트라우마를 안은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와타나베이다.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은 와타나베가 나오코와 함께 들었던 추억의 노래이다. 그래서 그는 20년이 지나서도 그 노래를 잊지 못해서인지 나오코를 잊지 못해서인지 괴로워한다. 좋았으면 추억이고 아팠다면 경험이라는 말이 있는데, 와타나베는 좋은 추억도 아픈 경험도 아닌, ‘아픈 추억’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기억하기 싫지만 떠올릴수록 생생한 사람, 아픔을 감수해서라도 다시 붙잡아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 있지 않은가? 필자 역시 원망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혹은 미안함이 가득한 사람이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잠시나마 돌아가고 싶은 시절도 있다. 와타나베에게는 기즈키와 나오코일 것이다. 미도리에게는 아버지일 것이고, 나오코에게는 기즈키와 친언니일 것이다. 나가사와에게는 하쓰미일 것이다. 당신의 ‘아픈 추억’은 누구이고 어느 때인지 <노르웨이의 숲>을 통해 온전히 느낄 것이다. 아픈 추억을 되살리는 것은 조금 버거운 일이지만, 해내고 나면 개운하고 속 시원할 것이다. 


코로나 시대, 2000년대 들어 현대인의 상징이었던 ‘외로움과 공허함’은 더욱 짙어져만 간다. ‘소통의 시대’라고 하지만 진정한 소통은 부재한 가운데 다들 고독과 상실의 시대 속에서 허덕인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전 세계를 멈춰버렸다. 갑작스러운 브레이크에 모든 사람이 넘어지고 다쳤다. 모두 마음을 다친 요즘, 스스로의 마음을 깊게 살펴보는 시간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자신과의 솔직한 소통을 원한다면 이 소설을 읽어보면 좋겠다. 이 책이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할 것이라고 장담까지는 못하나,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는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의 상처, 트라우마, 아픈 추억과 껄끄러운 감정 없이 마주 앉을 수 있을 것이다. 

 


李?仁, 尹惠暎. (2015).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론. 일본문화학보, 64(), 323-342.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sytimes.co.kr/news/view.php?idx=994
  • 기사등록 2021-04-05 13:16:54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