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빈
[한국심리학신문=채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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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향한 경주(Race to the bottom)이라는 말이 있다. 국가나 지역 등이 산업 등의 유치를 위하여 최저 임금을 삭감하고 환경 규제를 철폐하는 등, 유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여러 규제를 서로 완하하다보니 이것이 경쟁처럼 이루어지고, 결국 사회의 구조가 악화되는 현상을 뜻한다. 즉, 사회가 점차 바닥이라는 최저점을 향해 경쟁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저 정치학 및 경제학의 용어이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여러 시사점을 주곤 한다. 사람들은 왜 실패를 두려워할까? 실패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실패를 마치 피해야 할 재앙처럼 느낀다. 도전보다 회피를 선택하고 가능성보다 안전을 택하는 모습은 개인의 성격 문제로 종종 설명된다. 물론 사업과 같이 큰 영역에서 실패를 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그런 거대한 실패에만 국한되지 않고 어찌보면 매우 사소한 실패마저 끝없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실패에 대한 공포는 단순히 개인의 우울함이나 자신감 부족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어찌보면 그 근본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환경이 만들어낸 구조적인 압박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완벽을 향한 교육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형성된다. 어린 시절 우리는 성취를 통해 칭찬받고 실수를 통해 꾸중을 듣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사회화된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필요한 것이 당연한 사실이나, 종종 실수할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실패는 배움의 일부가 아니라 피해야 할 부정적 사건으로 학습된다. 점수와 등수와 결과가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은 자연스럽게 실패를 자기 부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실패는 곧 무능함의 증거가 되고 인정받지 못함의 신호가 된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실패는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정체성의 위협으로 느껴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가치감 수반성(Contingent self-worth)을 언급해 설명한다. 자기가치감이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한 기준을 뜻하는데, 이때 자기가치감의 수반성이 작용해 타인이 내 가치를 지난 날동안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내제화한다. 그동안 그들은 실패와 함께 완벽을 요구받으며 강한 꾸지람을 듣게 되자 실패를 하면 내가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 같고 사회에서 밀려날 것 같은 불안이 뒤따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패 가능성이 있는 선택 앞에서 쉽게 움츠러든다. 실패 자체보다 실패 이후에 따라올 평가와 낙인이 더 두려운 것이다. 이는 곧 자존감과도 연결되어있다.
무한경쟁과 쓸모 없는 나
현대 사회는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강화한다. 경쟁은 일상화되었고 비교는 일상이 되었다. 정보화 혁명과 함께 급성장한 SNS는 우리의 삶을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시공간적 제약이 적게 만들었고, 서로의 삶을 바다 건너까지 알릴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의 성공은 빠르게 공유되고 실패는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된다.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겉으로는 희망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실패한 사람은 노력하지 않았다는 암묵적인 비난이 숨어 있다. 이 구조 속에서 실패는 개인의 문제로 고립된다. 사회는 실패의 맥락을 보지 않고 결과만을 평가한다.
이러한 환경은 실패를 학습의 과정이 아니라 탈락의 신호로 만든다. 한 번의 실패가 다시 도전할 기회를 주기보다 기회를 박탈하는 조건이 되는 사회에서는 실패에 대한 공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재도전의 여지가 적은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실패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한한다.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으니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할 수 있다는 심리가 작동한다.
실패가 두려운 우울한 삶
실패에 대한 공포는 우울감, 우울증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우울한 사람은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실패를 하면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은 도전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물론 모든 우울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울 역시 그저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기에는 부족하다. 사회적 지지의 부재와 과도한 성과 중심의 문화는 개인의 심리적 회복력을 약화시킨다. 외로운 경쟁의 사회에서 홀로 버텨야 하는 개개인에게 실패는 곧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된다.
또한 실패를 드러내기 어려운 분위기도 문제다. 실패를 말하는 순간 무능력한 사람으로 규정될 것 같은 두려움은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실패 경험은 공유되지 않고 성공담만이 반복된다. 실패한 사람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데 모두가 성공한 삶을 이야기하고, 서점에서는 성공담을 담은 책만 가득하다. SNS에서는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뽐내는 글과 영상, 사진, 방송이 끝없이 재생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만 뒤처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모두가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실패는 더 큰 고립감을 낳는 것은 기정사실일 뿐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개인의 심리와 사회적 환경이 맞물려 형성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자존감과 정서 상태는 사회가 제공하는 기준과 안전망의 영향을 받는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은 개인의 의지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가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에게 용기를 요구하는 것은 잔인한 일일 수 있다.
부담을 줄이는 사회
실패를 덜 두려운 경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실패를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중요하다. 교육과 직장과 사회 전반에서 실패를 공유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될 때 사람들은 실패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이는 개인의 심리적 부담을 줄이고 도전을 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사회적 안전망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는 중요한 요소다.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될 때 사람들은 실패를 끝이 아닌 경유지로 인식한다. 실패 이후의 삶이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이 줄어들면 도전에 대한 심리적 장벽도 낮아진다. 이는 개인의 용기를 탓하기보다 환경을 바꾸는 접근이다.
실패가 덜 두려운 세상 만들기
우리는 종종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더 강해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필요한 것은 개인의 강인함이 아니라 실패를 견딜 수 있는 사회다. 실패해도 존엄이 훼손되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할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감정이다. 개인의 우울과 불안은 사회가 만들어낸 기준과 압박의 반영일 수 있다.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시선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실패를 새로운 출발로 바라볼 수 있다.
아직 사회로 진출하지 않은 청소년들의 자살률은 지난 2023년 기준 7.9명이라고 한다. 아직 사회가 어떤 곳인지 피부로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이들은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각박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이는 국내적 수준에서만 높은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래 없는 수치이다. 한국은 어째서 자살률 1위의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국가가 되었고, 가장 비탄에 잠긴 민족이 살게 되었는가? 청춘을 즐기고 추억을 만들어야할 이들이,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은 이들마저 어째서 자기보존이라는 생물학적 본성을 깨는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었는가?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이 모든게 그저 그들의 잘못인가? 나는 감히 묻고싶다.
새해는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불러온다. 목표를 세우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환경이다. 실패를 덜 두려운 경험으로 만드는 일은 개인의 몫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과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중요한 것은 결과라는 식으로 반박할 수 있을 것이나, 실패를 과하게 두려워하면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고,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면 사회는 동력을 잃고 멈춘다. 그 사회는 활력 없고 수동적이며 암울한 세계가 된다. 실패는 긍정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하는 것은 적어도 우리는 그들이 실패해도 다시 사회로 돌아오게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실패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수 있다면 도전은 더 이상 특별한 용기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선택이 될 것이고, 도전은 곧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이정우. "세계화와 '바닥을 향한 경주'". 한겨레. 2009.01.18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334025.html
2) 정은선, 하정희 and 이성원. (2017). 자기가치감 수반성(우월성, 타인승인)과 우울과의 관계에서 인지적 유연성의 조절효과. 학교사회복지, 40, 95-111.
3) 나상현. "하루 38명이 스스로 목숨 끊었다…10대 자살률은 역대 최대". 중앙일보. 2024.10.04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2105
4) 안혜정.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 [실패 특집 ②]". Economy 21. 2025.09.24
5) 박윤예. ""해보지도 않고 왜 벌써 걱정해"...실패 걱정말라는 세상이 온다 [Book]". 매일경제. 2025.03.29
https://www.mk.co.kr/news/culture/11277034
6) 이종섭. ""효율성만 쫓는 사회가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들어"". 경향신문. 2024.11.19
https://www.khan.co.kr/article/202411191427011
7) 최소라, 하다임. "연락 피하고, 일 자꾸 미루는 그… 심리학자가 알려주는 진짜 이유는?". 헬스조선. 2026.01.08
https://m.health.chosun.com/svc/news_view.html?contid=2026010803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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