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이후의 시간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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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박정호는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우산 없이도

빠르게 걸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달력을 보았다.

날짜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된 지

며칠이 지났는지

헤아리다 말았다.


시간은 흐르는데

자신만 멈춰 있는 기분이었다.


점심 무렵,

그는 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나갔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그 흐름을 느끼고 싶었다.


지하철역 앞은

늘 붐볐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

이어폰을 낀 젊은이들,

통화를 하며 걷는 중년들.


모두

자기 자리로 향하는 얼굴들이었다.


박정호는

그들 사이를 지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빈손이었다.


회사 배지를 달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카페에 들어가

창가에 앉았다.

주문을 받고 있는 직원은

서두르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생각했다.

이제는

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커피가 나올 때까지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자리에서는

두 사람이 노트북을 펼쳐놓고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건 오늘 안에 마무리해야 해.”


그 말이

그의 귀를 붙잡았다.


오늘 안에.

마무리.


그는

언제부터

마무리해야 할 일이

없어진 걸까.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넘겼다.

전화를 걸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막상 손이 가지 않았다.


누군가의 하루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자신의 멈춰 있는 하루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젊은 부부를 만났다.


“퇴근길이세요?”


그들이 웃으며 말했다.


“아, 네.”


박정호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 말이

거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도착하자

김미경이 있었다.


“밖에 다녀왔어요?”

“응.”

“어땠어요?”


그 질문에

그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다들… 바쁘더라.”


김미경은

그 말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그렇지 뭐.”


그녀의 대답은

담담했다.


저녁이 되어

둘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말은 많지 않았다.

박정호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나만…

멈춘 것 같아.”


그 말은

처음 꺼내는 말이었다.

김미경은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녀의 말은

위로였지만

확답은 아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박정호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은 움직이는데,

자신만 제자리에 서 있는 느낌.


하지만

그는 아직 몰랐다.

멈춘 것처럼 보이는 시간도

사실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작가의 말 :

은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나만 멈춘 것 같다”고.

하지만 멈춤은

종종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11화는 ‘속도에서 벗어난 불안’을 담았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고립을 선택하는 마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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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6-01-16 09: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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