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이후의 시간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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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는 그날따라

사소한 소리에도 예민해졌다.

냉장고 문이 닫히는 소리,

현관에서 울리는 택배 초인종,

아침 뉴스의 앵커 목소리까지.


모든 것이

조금씩 거슬렸다.

그는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확신하지 못했다.


분명 큰일은 없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김미경은

부엌에서 반찬을 만들고 있었다.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오늘 병원 다녀올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어디 아파?”

“아니. 정기검진.”


박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꼭 오늘 가야 해?”


김미경의 손이

잠시 멈췄다.


“왜?”

“아니, 그냥.”


그 ‘그냥’이라는 말이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당신 요즘

조금 예민한 것 같아.”


그녀의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피하지 않았다.


박정호는

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기 힘들었다.


“내가 뭐.”

“아니라는 게 아니라…

말투가 그래.”


그 말에

무언가가

안쪽에서 꿈틀거렸다.


“다들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하잖아.”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김미경은

놀란 듯 그를 보았다.


“그런 뜻 아니야.”

“그런 뜻이든 아니든

다 똑같아.”


박정호는

말을 멈추지 못했다.


“회사 다닐 땐

아무도 나한테

이렇게 말 안 했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는 스스로도 놀랐다.


그 안에는

분노가 아니라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김미경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


“당신,

지금 화난 건

나한테가 아니잖아.”


그 말이

정확히 맞았다.

하지만

맞는 말일수록

더 아팠다.


박정호는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신발을 제대로 신을 겨를도 없이

밖으로 나섰다.

걸으면서도

숨이 가빴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동안

참아온 말들,

삼켜온 감정들.


퇴직과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안에서 곪아 있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한참을 고개 숙인 채 있었다.

화를 낼 대상은

사실 아무도 아니었다.

화가 난 건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

더 힘들었다.


해가 기울 무렵,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김미경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미안해.”


박정호가 말했다.

짧은 말이었다.

김미경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조금 성급했어.”


완벽한 화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박정호는 알았다.

말하지 못했던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다만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걸.




작가의 말 :

분노는

갑자기 생기지 않습니다.

오래 눌러둔 감정이

형태를 바꿔 튀어나올 뿐입니다.

13화는 ‘은퇴 이후 드러나는 감정의 표면’을 그렸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노화와 함께 찾아오는 또 다른 불안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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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6-01-20 09: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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