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아침 햇살이
거실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박정호는
그 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제는
사람을 만났고,
대화를 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그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김미경은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좀 표정이 다르네.”
그녀가 말했다.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런가.”
박정호는
괜히 미소를 지었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는 말했다.
“나…
뭔가 좀 해볼까 생각 중이야.”
김미경은
그를 바라보았다.
놀라기보다는
기다렸다는 표정이었다.
“뭐든 좋아.”
그녀의 말은
조건이 없었다.
박정호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큰일 말고.
일 같은 거 말고.”
그 말이
자신에게도
중요하게 들렸다.
일이 아니라,
일 같은 것.
역할이 아니라,
의미.
그는 오후에
동네 주민센터를 찾았다.
게시판에는
여러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노인 대상 컴퓨터 교육,
독서 모임,
환경 정화 활동,
자원봉사 모집.
그는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어르신 재능기부 봉사자 모집’
그 문구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재능.
그는
자신에게 그런 게 있는지
잠시 생각했다.
회사에서 쌓아온 경험들,
사람을 관리하던 일,
문제를 조정하던 일.
그건
회사 안에서만 의미 있는 줄 알았다.
담당 직원이
그를 보며 말했다.
“관심 있으세요?”
박정호는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보통이에요.”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일단 오셔서
얘기해보면 돼요.”
그 말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박정호는
오랜만에
하루가 짧게 느껴졌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는 말했다.
“주민센터 다녀왔어.”
“거기 왜?”
“그냥…
구경.”
그는 웃으며 말했다.
“근데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있더라.”
김미경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조용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그날 밤,
박정호는
노트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적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직
내용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제목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오랜만에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느끼지 않았다.
아주 작게,
아주 조용하게.
자기 자리를
다시 만들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작가의 말 :
은퇴 이후의 삶은
‘새로운 직업’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찾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18화는 ‘쓸모를 다시 정의하는 시간’을 담았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관계가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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