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달력의 날짜를 지우는 일이
박정호에게는
이제 의미 없는 습관이 되었다.
무슨 요일인지,
며칠이 지났는지보다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그는
아침 커피를 마시며
노트를 펼쳤다.
요즘은
매일 한 줄씩이라도
적으려고 했다.
‘오늘 할 일.’
그 아래에는
아직 빈칸이 많았다.
김미경이
식탁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요즘
뭔가 계획 세우는 것 같네.”
“그런가.”
박정호는
펜을 돌리며 말했다.
“그냥…
시간을 좀
의미 있게 쓰고 싶어서.”
김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한테
그럴 시간이 온 거지.”
그 말은
부추김도,
재촉도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인정이었다.
오후에
박정호는 혼자 산책을 나갔다.
동네를 벗어나
조금 더 멀리 걸었다.
길가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는
퇴근길에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 냄새가 났다.
조용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이 각자 책을 보고 있었다.
박정호는
서가를 천천히 훑었다.
자기계발서도,
경영서도 아닌
에세이 코너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노년의 삶에 대하여.’
그 문장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책을 한 권 꺼내
자리에 앉았다.
처음 몇 장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지나자
문장이 천천히
몸 안으로 들어왔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 문장을 읽고
박정호는
책을 덮었다.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남은 시간.
그 표현은
막연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생각했다.
시간은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니라,
다른 형태로
주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저녁 식사 후,
박정호는
김미경에게 말했다.
“나…
주민센터 봉사
조금 더 해볼까 생각 중이야.”
김미경은
놀라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괜찮아.
확실해질 때까지
생각해도 돼.”
그 말에
박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정답을 찾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루하루
선택해 나가는 일이었다.
그날 밤,
박정호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남은 시간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아직은
미완성이었지만,
그 문장은
그의 하루를
조금 앞으로 움직이게 했다.
작가의 말 :
노년의 삶은
‘얼마나 남았는가’보다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26화는 ‘시간을 다시 설계하려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선택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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