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미
[한국심리학신문=박찬미(pcm4329@naver.com)]

악의 평범성: 우리 안의 불편한 거울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며 제시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홀로코스트처럼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에 가담한 이들이 사실은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평범한 관료였다는 사실은 우리가 품고 있는 세계관을 근본부터 뒤흔든다.
사람들은 항상 악인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뉴스에 등장하는 범죄자들의 얼굴에서 평범함과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려 하고, 그들의 성장 과정에서 각종 트라우마를 찾아내며 안도한다. “저 사람은 원래부터 문제가 있었던 거야”라고 말할 수 있으면, 우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 나와 내 주변은 저들과는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범죄 연구가 보여주는 현실은 이와는 전혀 딴판이다.
르완다의 집단학살에 참여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평범한 농부와 교사였다. 오래도록 함께 살아온 후투족 주민이 어느 날 갑자기 같은 마을의 투치족 이웃을 향해 마체테를 들었다. 발칸 전쟁 시기 스레브레니차 학살에 가담한 이들도 예전에는 함께 축구를 하고 커피를 마시던 평범한 이웃이었을 뿐이다.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살인자였을까? 아니다. 특별한 상황과 구조가 평범한 사람을 가해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이런 현상을 실험실 안에서 직접 보여준다. 평범한 사람이 권위자의 명령만으로도 타인에게 쉽게 고통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악행이 꼭 특별한 성격적 결함에서 비롯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 중 65%가 치명적일 수 있는 전기충격을 가하라는 지시에 따랐다. 이들은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 그저 권위에 순응하는 평범한 이들이었다.
국제범죄의 현장은 이 평범성의 메커니즘을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국제 인신매매 조직의 하부 구성원 대부분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다 생계를 위해 범죄에 손을 댄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단지 누군가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에만 관여하며 끝을 알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한다. 책임은 여러 사람에게 분산되고, 각자는 “나는 시스템의 한 톱니바퀴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불법 무기 거래망도 마찬가지다. 서류를 처리하는 공무원, 물류를 담당하는 직원, 자금 세탁을 담당하는 금융인들. 이들 각자가 자신의 일이 먼 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현실, 예를 들어 분쟁 지역의 어린이가 죽는 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직접 보지는 않는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그들의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집단 심리는 이런 과정을 더욱 빠르게 만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집단에 속하고, 그 규범을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 극단주의 조직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든다. 처음엔 상상도 못 한 행동들도, 집단의 규범이 점차 변하면서 정상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다들 하잖아”라는 말은 강력한 합리화 논리가 된다. 결국 개인의 양심은 집단의 압력 앞에 옅어지고 만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있다. 사이버 범죄와 국제 금융 사기, 암호화폐를 이용한 불법 거래 등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든다. 화면에 떠 있는 숫자들은 실제로 파산한 가족들의 눈물을 담지 못한다. 클릭 한 번으로 수많은 사람의 삶이 망가질 수 있지만, 정작 가해자는 그 고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범죄가 추상화될수록 죄책감도 함께 흐려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단순히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정의를 위해 처벌은 필요하지만, 악을 낳는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개인만 책임을 묻는 것은 마치 증상만 치료하고 근본 원인은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두 번째로, 사회적 안전망을 더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경제적 절박함이 범죄의 온상이 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모두가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세 번째는 교육의 역할이다. 권위에 무조건 따르지 않고, 부당한 명령에 "왜?"라고 물을 수 있는 비판적 사고를 길러야 한다. 윤리적 판단력 역시 추상적인 도덕 교육보다는 실제 상황에서 딜레마를 토론하며 자라난다.
네 번째는 투명성이다. 권력과 자본의 흐름이 불투명할수록 범죄가 자랄 공간도 커진다. 그래서 정치와 경제 시스템이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하고,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제도도 필요하다. 다섯 번째는 개인이 집단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도록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니오"라고 말할 용기를 격려하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받지 않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내면에도 악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황과 구조가 달라진다면 나조차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 불편함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
악이 평범한 삶 속에서 생겨난다면, 그 조건도 바꿀 수 있다. 평범한 선택이 악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도 쓰일 수 있다. 국제범죄를 줄이는 첫걸음은 악을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보는 용기에서 나온다. 그 불편한 거울 앞에 서야만,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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