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언지
[한국심리학신문=임언지(alice6472@naver.com)]

이미 방전된 상태로 시작하는 하루
나는 아직 정식 직장인도 아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배터리가 방전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학교 수업 듣고, 스펙 쌓으려 대외활동 알아보고, 인턴 자리 검색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미래를 준비한다. 겉보기엔 성실하고 생산적인 하루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무기력함이 자리 잡고 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이상하게 의욕이 생기질 않는다.
가끔 ‘이게 번아웃인가?’ 싶다가도 금세 고개를 젓는다. “아직 사회생활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번아웃이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러곤 이렇게 결론 내린다. “남들도 다 이만큼은 힘들겠지.” 나는 그렇게 지쳐가는 내 모습을 어떤 ‘증상’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쯤으로 여겨왔다.
번아웃, 직장인만의 문제일까?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번아웃을 ‘관리되지 않은 만성 직장 스트레스’라고 정의한다. 감정이 메말라버리고, 냉소적으로 변하고,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직업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 말만 들으면 번아웃은 회사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 같다.
하지만 요즘은 좀 다르다. 직장인뿐만 아니라 대학생이나 취준생, 프리랜서들까지 “나 번아웃 온 것 같아”라고 말한다. 이게 단순히 유행어처럼 번진 게 아니다. 번아웃이라는 개념 자체가 직장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우리 청년 세대가 겪는 마음의 상태를 설명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거다.
청춘은 왜 소진되는가
실제로 국내 연구들을 보면 대학생들도 직장인처럼 정서적으로 탈진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공부 스트레스가 클수록 더 빨리 지치고, 진로가 불안하거나 부모님 기대가 클수록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진다. 결국 번아웃은 단순한 피로감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심리적 압박이 합쳐진 상태인 셈이다.
정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봐도 청년들의 스트레스나 우울 위험은 꽤 높은 편이다. 문제는 이런 긴장감이 시험이나 면접 같은 특정 시기에만 반짝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불확실한 미래와 끊임없는 경쟁 때문에 우리는 항상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긴장 상태로 살아간다.
특별히 힘든 날에만 지치는 게 아니라, 기본값으로 ‘지침’을 깔고 사는 것. 여기서부터 번아웃의 일상화가 시작된다.
피곤한 게 너무 당연해진 세상
일상화되었다는 건 단순히 자주 겪는다는 뜻이 아니다. 더 이상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친구를 만나도 다들 “힘들어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사니까, 내가 지치는 것도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라는 말은 위로가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마음이 보내는 위험 신호를 무시하게 만든다.
어려운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상황은 명확하다. 우리가 해내야 할 기대치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계속 커지는데, 마음의 안정을 찾거나 내 뜻대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은 부족하다. 노력해도 결과가 바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반복되면, 사람은 점점 무기력해진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자꾸 좌절하다 보면 시도조차 줄어든다. 그러다 결국 최소한의 겉모습만 유지하는 상태가 된다. 와르르 무너지는 게 아니라,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깎여나가는 것이다.
무뎌지는 감각과 위험한 착각
스트레스가 만성이 되면 감정도 무뎌진다. 예전 같으면 속상해서 울었을 일도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버린다. 집중이 안 되는 날은 내가 게을러서라고 탓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그냥 잠이 부족해서라고 합리화한다.
이때부터 번아웃은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라 나의 ‘성격’으로 오해받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끈기가 없어”, “내 성격이 원래 좀 예민해.”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도움을 요청해야 할 신호는 자책거리로 변질된다. 번아웃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그냥 참고 견뎌야 할 내 몫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가장 위험한 건 바로 이 지점이다. 피곤한 것 자체보다, 피곤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 태도 말이다.
다시 내 마음 들여다보기
번아웃은 이제 흔한 일이 됐다. 하지만 흔하다고 해서 그게 정상인 건 아니다. 탈진한 상태를 배경음악처럼 깔고 사는 대신, 몸과 마음이 보내는 경고 신호로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 ‘남들도 다 힘드니까’라는 말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 핑계 뒤에 숨는 걸 멈추는 것, 어쩌면 거기서부터 진짜 회복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대단한 해결책을 찾으라는 게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 내가 느낀 피로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오늘은 좀 지쳤네, 쉬어가도 괜찮아"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는 용기. 남들의 속도에 맞추느라 방전된 나를 다그치지 않는 것. 그 사소한 인정이 무뎌진 감각을 다시 깨우고,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첫걸음이 될 테니까. 그러니 잠시 멈춰도 돼.
* 참고 문헌
1) 김현우. (2016). 학업 스트레스와 학업 번아웃의 관계에서 부모 학업관여 행동의 조절효과. 한국청소년학연구, 23(9), 1-20.
2) 박수정. (2017). 번아웃 증후군의 조작적 정의에 관한 체계적 문헌고찰. 한국심리학회지: 건강, 22(3), 607-627.
3) 보건복지부. (2022). 정신건강실태조사. 세종: 보건복지부.
4) 세계보건기구(WHO). (2019).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ICD-11): 번아웃. 제네바: 세계보건기구.
5) Bakker, A. B., & Demerouti, E. (2007). The job demands–resources model: State of the art. Journal of Managerial Psychology, 22(3), 309-328.
6) Maslach, C., & Jackson, S. E. (1981). The measurement of experienced burnout. Journal of Occupational Behavior, 2(2), 99-113.
7) Seligman, M. E. P. (1975). Helplessness: On depression, development, and death. New York: W.H. Free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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