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간 IT 회사. 연봉도 나쁘지 않고, 일도 제법 잘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하는 이 일, 1~2년 뒤에도 내가 하고 있을까?'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조용히 공무원 시험 준비 카페를 기웃거린 적이 있다면, 당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AI 기술 확산으로 IT 업계에서 구조조정이 잇따르면서, 적지 않은 IT 개발자와 전산 직군 종사자들이 공무원 시험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민간에서 공공으로 이동하는 이 현상, 단순한 직업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 밑에는 꽤 복잡한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사람은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면 본능적으로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 bias)'이라고 부른다. 대니얼 카너먼 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명예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같은 크기의 이득보다 손실을 약 2.5배 더 크게 느낀다. 지금 가진 것을 잃는 두려움이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기대보다 훨씬 강하게 행동을 이끈다는 뜻이다.
AI 발 고용 불안이 현실이 된 IT 업계에서, 개발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다. '내 자리가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구체적인 공포다. 한 IT 기업에서 구조조정을 경험한 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A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AI 회사에 들어가도 또다시 구조조정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반복될 수 있는 위협에 대한 경험은 뇌의 편도체를 자극해 만성적인 경계 상태를 만든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인간은 장기적인 보상보다 단기적 안전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바꾼다. 높은 연봉의 불안한 자리보다, 적어도 '내일도 출근할 수 있다'는 확신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을 더 크게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AI 고용 불안이 일반적인 취업난과 다른 점이 있다. 기존의 고용 위기는 '더 열심히 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믿음을 허용했다. 하지만 AI는 다르다. 아무리 실력을 쌓아도 기계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해낼 수 있다면, 노력과 성과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겨버린다. 심리학에서 마틴 셀리그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가 제안한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 개념이 바로 이 상황에 딱 맞는다. 자신의 행동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반복해서 경험하면, 결국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IT 직군 종사자들이 공무원을 택하는 심리의 핵심에는 바로 이 통제감 회복의 욕구가 있다. 공무원 시험은 결과가 예측 가능하다. 공부한 만큼 점수가 나오고, 점수가 되면 합격한다. AI가 시험을 대신 볼 수 없고, 알고리즘이 나를 대체할 수도 없다. 이 단순한 사실이 불안한 IT 종사자들에게는 강력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2023년 미국심리학회(APA)가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51.8%가 AI로 인한 직업 상실 가능성에 심각한 불안을 느낀다고 답했다. 특히 IT 및 기술직 종사자 집단에서는 이 비율이 68.3%까지 치솟았다. 단순한 기우가 아니라, 광범위하게 퍼진 실제 심리적 고통이다.
직업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직업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정의한다. 수년간 코딩을 배우고, 밤새 프로젝트를 완성하며 쌓아온 '나는 개발자다'라는 정체성이 AI 한 줄의 코드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하면, 이것은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자아의 문제가 된다. 에이미 레즈네스카야 미국 워싱턴대 심리학과 교수는 직업 정체성이 위협받을 때 사람들이 경험하는 감정을 '직업적 애도(occupational grief)'라고 표현했다.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을 때와 유사한 상실감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공무원으로의 전환을 고민하는 IT 직군 종사자들 중 상당수가 단순히 월급이나 안정성 때문만이 아니라, '이 분야에서 내가 설 자리가 있는가'라는 실존적 질문과 씨름하고 있다. 새로운 직업으로의 이동은 어쩌면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는 능동적인 시도일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는 자아를 보호하려는 건강한 적응 반응이기도 하다.
다만 전문가들은 공포에 기반한 선택이 장기적 만족감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불안을 피해 도망치듯 선택한 직업은, 막상 들어간 뒤에도 새로운 불안의 씨앗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고용 불안은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큰 문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심리학은 불안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적절한 불안은 실제로 행동을 촉진하고 변화를 이끄는 동기가 된다. 조용 데이비스 미국 컬럼비아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이 2022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하루 한 가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행동'에 집중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불안 수준이 33.1% 낮았고, 직업 전환 후 만족도도 유의미하게 높았다.
공무원 시험이든, 기술 업그레이드든,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의 전환이든 중요한 것은 '도망'이 아닌 '선택'의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오늘 당장 이력서를 열어보거나, 배우고 싶었던 분야의 강의 한 편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이 AI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은 결국,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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