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답장을 보내려다 문득 멈칫한다. '이번 달 외식비가 이미 예산을 넘었는데….'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갑 사정이 발목을 잡는다. 결국 "다음에 보자"는 짧은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최근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이 부쩍 늘고 있다. 외식비, 카페 이용료, 교통비가 한꺼번에 오르면서 친구를 만나고 관계를 유지하는 데 드는 경제적 부담이 커지는 현상, 이른바 '프렌드플레이션(Friendflation)'이 새로운 사회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이 단순한 지갑 문제가 아니라고 경고한다.
프렌드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inflation)과 친구(friend)를 합친 신조어다. 외식비와 카페 이용료, 교통비, 문화생활 비용 등이 크게 오르면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데 드는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는 사회 현상을 가리킨다. 한다혜 트렌드코리아 소비트렌드 분석센터 연구원은 최근 KBS 1라디오에서 "과거에는 친구가 많을수록 좋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만남 자체에 드는 비용이 관계 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난해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80%가 친구를 만날 때 경제적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 중 43%는 자신보다 경제적 여건이 나은 친구와의 만남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고 응답했다.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현상이 표면적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빠서 못 만난다', '요즘 좀 피곤하다'는 말 뒤에 진짜 이유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 부담을 솔직하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제적 이유로 만남을 피하는 행동의 이면에는 복잡한 심리 기제가 작동한다. 브레네 브라운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수십 년간의 연구를 통해 경제적 어려움이 단순한 물질적 문제가 아니라 수치심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경제적으로 뒤처진다는 느낌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숨기게 만들고, 관계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나게 한다"고 밝혔다.
이 수치심은 관계를 더욱 빠르게 약화시킨다. 상대방이 비싼 식당을 제안할 때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담을 느끼다 보면, 점점 연락을 먼저 끊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비교 불안(social comparison anxiety)'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타인에게 평가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회피 행동을 강화하는 것이다.
특히 소셜미디어(SNS)가 이 불안을 증폭시킨다. 친구들이 업로드하는 고급 레스토랑 사진, 해외여행 게시물을 보며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 실제로 만남의 빈도는 더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경제적 부담으로 인한 관계 회피가 쌓이면, 그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비벡 머시 전 미국 공중보건국장은 2023년 발표한 공식 보고서에서 외로움을 '공중보건 위기'로 규정하며, 사회적 고립이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과 맞먹는 건강 위협을 가한다고 경고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성인 2명 중 1명이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며, 이는 심장병, 치매, 조기 사망의 위험을 각각 29%, 50%, 26%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로빈 던바 영국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명예교수의 연구도 주목할 만하다. 던바 교수는 인간이 안정적인 정서를 유지하기 위해 핵심 친밀 관계를 최소 5명 이상 유지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대면 만남의 빈도가 줄어들수록 이 핵심 친밀 관계의 숫자가 급격히 감소한다. '그냥 바빠서 못 만난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사이가 어느 순간 서먹한 관계로 변해 있는 경험, 나만 겪은 게 아닌 것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응답이 2019년 16.5%에서 2023년 21.4%로 꾸준히 늘었다. 고물가 시대가 길어질수록 이 수치는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심리학자들은 '만남의 형식'을 바꾸는 것이 핵심이라고 조언한다. 니컬러스 크리스타키스 미국 예일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대면 만남이 주는 정서적 효과는 장소나 비용이 아니라 '얼마나 진솔하게 연결되었느냐'에서 온다고 강조한다. 비싼 식당 대신 공원 산책, 집에서 함께 요리하기, 동네 카페에서의 짧은 만남도 충분히 관계를 회복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생각보다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요즘 형편이 빠듯해서 저렴한 데서 보자'는 말 한마디가 어색할 수 있지만, 진심을 공유한 친구 사이는 오히려 더 깊어지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 어려움을 숨기다 조용히 관계에서 물러나는 것보다, 솔직한 한 마디가 훨씬 나은 선택일 수 있다. 오늘 문득 얼굴이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면, 비싼 장소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오랜만이야,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가볍게 연락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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