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헤어진 줄 알았다. 관계도 끝났고, 법적으로도 정리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또 나타났다. 집 앞을, 직장 앞을, 아이 학교 앞을 서성인다. 50대 주부 A씨가 경찰에 신고를 넣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했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남편이 또 찾아왔어요.'
연합뉴스 등 다수 매체가 보도한 피해자전담경찰관 운영 실태 기사에서 이 사례가 소개되자, 많은 독자들이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 '왜 스토킹 가해자는 멈추지 않는 걸까.' 그리고 또 하나. '왜 피해자는 더 일찍 도망치지 못했을까.' 심리학은 이 두 질문에 모두 대답을 갖고 있다.
스토킹은 단순한 집착이 아니다. 신경과학적으로 보면 일종의 보상 회로 오작동이다. 헬렌 피셔 미국 럿거스대 인류학과 명예교수는 거절당한 연인의 뇌를 fMRI로 촬영한 연구에서 놀라운 결과를 발표했다. 상대에게 거절당한 직후에도 뇌의 복측피개야, 즉 도파민 보상 회로가 오히려 더 활발하게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이 회로는 마약, 도박 중독과 같은 영역에서 작동하는 뇌 부위다. 쉽게 말해 스토커의 뇌는 상대를 '잃어버린 보상'으로 인식하고, 되찾으려는 충동을 멈추지 못한다. 피셔 교수는 이를 '거절 유발 강박(Rejection Induced Obsession)'이라고 불렀다. 관계가 끊길수록 집착이 강해지는 역설적 구조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상태에서 분노와 집착이 동시에 활성화된다는 점이다. 피셔 교수 연구팀이 2010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거절당한 경험자의 뇌에서는 편도체 활성화와 함께 전전두엽 억제 기능이 현저히 떨어졌다. 충동 조절이 안 되는 상태, 그게 스토킹 가해자의 뇌다.
스토킹 피해자, 특히 전 파트너에 의한 피해자에게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왜 진작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이 질문은 심리학적으로 매우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 도나 버스타인 미국 콜롬비아대 임상심리학과 교수는 장기 친밀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스토킹 피해자 연구에서 '트라우마 본딩(Trauma Bonding)'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했다.
트라우마 본딩이란 학대와 애정이 불규칙하게 교차하는 관계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심리적으로 강하게 결속되는 현상이다. 가해자가 폭력적이었다가 갑자기 다정해지는 행동을 반복할 때, 피해자의 뇌는 그 다정함을 더 강렬하게 기억한다. 예측 불가능한 보상은 예측 가능한 보상보다 훨씬 강한 심리적 의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행동심리학의 핵심 원리다.
2019년 국내 여성가족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친밀한 관계에서 스토킹 피해를 경험한 여성 중 즉각 신고한 비율은 14.3%에 불과했다. 절반 이상인 54.7%는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렸다'고 답했다. 이건 용기 없음이 아니다. 트라우마 본딩이 만들어 낸 심리적 마비 상태다.
스토킹 가해자의 심리 저변에는 강한 통제 욕구와 소유 의식이 깔려 있다. 레아 도모보 영국 더럼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이 2021년 스토킹 가해자 21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가해자의 78%가 '상대방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68%가 '관계 종료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응답했다. 이들에게 이별은 상대의 결정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친밀 파트너 통제 신념(Intimate Partner Control Belief)'이라고 부른다. 배우자나 연인을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일부, 혹은 소유물로 인식하는 왜곡된 관계관이다. 국내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23년 스토킹 범죄 검거 건수는 8394건으로 2021년 대비 3.2배 증가했다. 피해자의 89.4%는 여성이었고, 가해자의 61.2%는 전 연인 또는 배우자였다.
문제는 이런 신념이 관계 안에서 서서히, 눈치채기 어렵게 자라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라는 말로 포장된다. 그 말이 점차 감시, 고립, 위협으로 바뀌어 갈 때 피해자는 이미 관계 안에 깊이 들어와 있다.
주변에 스토킹 피해를 겪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왜 진작 헤어지지 않았어?'라는 질문을 삼키는 것이다. 레아 도모보 교수 연구에서 피해자들이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던 이유 1위는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서'(42.1%)였다. 판단 없이 듣는 것, 그것이 피해자가 첫 발을 내딛을 용기를 준다.
실질적인 도움도 중요하다. 현재 경찰청은 전국 18개 시도 경찰청에 스토킹·가정폭력 피해자전담경찰관을 배치해 운영 중이다. 피해자전담경찰관은 신고 이후 수사뿐 아니라 피해자의 일상 회복까지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제도다. 112 신고와 함께 '피해자전담 연결'을 요청하면 된다. 여성긴급전화 1366도 24시간 운영된다.
누군가가 '그 사람이 또 왔어요'라고 말할 때, 그 한 문장에는 얼마나 오랜 두려움이 담겨 있는지 모른다. 혹시 지금 당신 주변에 그런 말을 삼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조용히 물어봐 주는 건 어떨까. '요즘 괜찮아?'라고.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sytimes.co.kr/news/view.php?idx=12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