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머뭇거린다. '내가 먼저 사과해야 하나?' '이미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사과해봤자 달라지는 게 있을까?' 그런데 배재고 야구부 사건은 우리에게 뜻밖의 장면을 보여줬다. 조롱 응원으로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그 팀이, 45일 만에 그라운드로 돌아와 홈플레이트 앞에 줄을 섰다.
상대 팀 선수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짧은 순간, 분노로 들끓던 여론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용서를 받아냈고, 징계는 감경됐다. 심리학은 이 과정을 오래전부터 설명해왔다. 진심 어린 사과가 왜 그토록 강력한 힘을 갖는지, 그리고 왜 우리는 그 사과를 그토록 어려워하는지를.
타인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 뇌에서는 위협 반응이 활성화된다. 이때 편도체가 과활성화되며 분노와 경계심이 높아진다. 그런데 상대방이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는 순간, 이 반응이 급격히 완화된다. 로이 러위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경영심리학과 명예교수가 2016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효과적인 사과는 피해자의 감정적 고통을 평균 37%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핵심 메커니즘은 '인정'이다. 사과는 단순히 '미안하다'는 감정 표현이 아니라, '당신이 받은 상처가 실재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는 행위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고통이 부정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생기고, 이것이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배재고 선수들이 홈플레이트에 줄을 서는 장면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사과가 용서를 이끌어내는 건 아니다. 로이 러위키 교수팀이 2016년 성인 75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에서, 효과적인 사과에는 여섯 가지 요소가 있음이 밝혀졌다. 책임 인정, 후회 표현, 설명 제공, 피해 선언, 회복 제안, 용서 요청이 그것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책임 인정'이었으며, 이것이 빠진 사과는 오히려 피해자의 분노를 더 키우는 경향이 있었다.
배재고 사태에서 주목할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선수들은 성명 발표에 그치지 않고 직접 상대 팀 앞에 섰다. 얼굴을 마주하고, 몸으로 인사를 건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행동적 사과'라고 부른다. 말로만 전달되는 사과와 달리, 신체적 행동이 수반된 사과는 진정성 신호로 해석되어 수용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광주일고 선수들과 학생들이 그 사과를 받아들인 것도, 단순히 마음이 넓어서가 아니다. 상대가 충분한 대가를 치렀고, 그 고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는 확인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과정을 '공정성 회복'이라고 설명한다. 잘못에 걸맞은 책임이 보였을 때, 우리 뇌는 비로소 분노를 내려놓을 준비를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과를 그토록 미루고 피하는 걸까. 타일러 험프리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심리학과 교수는 사과를 꺼리는 심리를 '자아 완결성 위협'으로 설명한다. 잘못을 인정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자아 이미지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이 방어본능이 작동하면, 사람들은 사과 대신 합리화와 변명을 택한다.
특히 집단 속에 있을 때 이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집단은 개인의 잘못을 희석시키고,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분산 효과를 만들어낸다. 배재고 선수들이 처음에 침묵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것도 이 심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주장 고현석이 나서 직접 발언하고, 팀 전체가 행동으로 사과에 나서는 순간 이 방어막이 무너졌다.
2023년 발표된 조지타운대 심리학팀의 연구에 따르면, 사과를 한 사람은 사과를 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사건 이후 자존감이 오히려 평균 22%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자아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단하게 만드는 역설이다.
흥미로운 건 용서하는 쪽의 심리다. 에버렛 워딩턴 미국 버지니아커먼웰스대 심리학과 교수가 30년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용서는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더 큰 심리적 이득을 가져다준다. 용서를 선택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불안과 우울 수준이 낮고, 신체 건강 지표도 유의미하게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분노를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은 상대에게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소진시키는 일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추적 사고'라고 부른다. 같은 장면을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할수록,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계속 높아지고 심신은 더욱 지쳐간다. 광주일고 학생들이 사과를 받아들인 건 단지 아량을 베푼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신들을 위한 현명한 선택이기도 했다.
오늘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사과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 '내가 그때 그랬는데, 많이 속상했지?'라는 짧은 한 마디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상대를 위한 것이기 이전에 오래 무거웠던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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