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밤 11시,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데 전화하기엔 미안하고, 혼자 삭이기엔 너무 힘든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챗GPT 창을 열고 '나 요즘 너무 힘들어'라고 입력한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은가?
실제로 AI 챗봇에게 감정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심리 상담 예약은 몇 주씩 밀리고, 비용도 부담스럽고, 무엇보다 '이 정도 고민으로 상담실까지 가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들에게 AI는 24시간 열려 있는 창구처럼 느껴진다.
AI 챗봇이 건네는 말은 사실 감정을 이해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AI와의 대화에서 '이해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클리포드 나스 미국 스탠퍼드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일관된 반응과 자신을 향한 언어에 노출될 경우 상대가 인간인지 기계인지와 무관하게 사회적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연구팀이 1994년부터 수행한 일련의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컴퓨터가 칭찬이나 위로의 말을 건넬 때 실제 인간에게 받을 때와 유사한 정서적 만족감을 보고했다.
이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의사사회적 상호작용(parasocial interaction)'의 확장 형태로 설명한다. 원래는 TV 속 연예인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일방적 관계를 가리키는 개념인데, AI와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을 거면 반드시 응답이 돌아오고, 나를 비난하지 않으며, 언제나 내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 외롭고 지친 순간에 그런 상대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문제는 이 '느낌'이 진짜 치료적 효과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리적 위안을 느끼는 것과 실제 심리 증상이 개선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AI 기반 심리 지원이 전혀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미디어랩 연구팀이 2023년 발표한 연구에서는 우울감과 불안감이 경미한 수준인 성인 참가자 271명을 대상으로 AI 챗봇 'Woebot'을 4주간 사용하게 한 결과, 참가자의 약 52%에서 우울 증상 점수가 유의미하게 낮아졌다. 연구팀은 특히 '즉각적인 접근성'과 '비판단적 환경'이 효과를 높이는 핵심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같은 연구는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공황장애 등 임상적 개입이 필요한 상태에서는 AI 챗봇이 증상을 개선하기보다 오히려 전문 치료를 지연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제임스 그로스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는 '감정 조절 연구' 분야의 대표적 권위자로, 정서적 처리에는 상대의 표정, 목소리 톤, 신체 언어 같은 비언어적 신호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AI는 이 요소를 원천적으로 제공할 수 없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과의존' 문제다. 챗GPT 등 범용 AI는 심리 치료를 목적으로 설계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용자 스스로 상담 대체제로 활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국내에서도 챗GPT에 '나 우울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내용을 입력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으며, AI가 항상 적절한 위기 개입 반응을 제공하지는 못한다는 점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공통된 우려로 떠오르고 있다.
사람들이 사람보다 AI에게 더 솔직해지는 이유가 있다. 스킵 리조라티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창의기술연구소 연구팀이 2014년 발표한 연구에서, 가상 면접관과 대화할 때 참가자들은 인간 면접관과 대화할 때보다 PTSD 증상을 30% 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를 '평가 불안(evaluation apprehension)'의 감소로 설명했다. 인간에게는 나쁘게 보일까봐, 이상하게 볼까봐 걱정되지만 AI에게는 그런 두려움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판단받지 않는다'는 감각은 특히 수치심이 동반된 고민, 예를 들어 자해 충동, 성적 정체성 혼란, 가족에 대한 미움 같은 주제를 꺼낼 때 심리적 문턱을 낮춘다. 이는 분명히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처음에는 AI에게 털어놓다가 '이 정도면 전문 상담이 필요하겠다'는 인식으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가교가 목적지가 되어버릴 때가 문제다. AI와의 대화가 편안할수록 인간 상담사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찾아가야 할 시점을 놓치기 쉽다. 위안과 치료는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AI 챗봇이 완전히 무용한 것도 아니고, 전문 상담의 완벽한 대안이 될 수도 없다. 현재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권고하는 방식은 'AI는 감정 일기장처럼, 위기 상황에서는 반드시 사람에게'라는 원칙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가벼운 용도로는 충분히 유용하지만, 수면 장애가 2주 이상 지속되거나 일상생활이 어려울 만큼 감정이 가라앉는다면 AI 창 대신 정신건강 위기상담 전화(1577-0199)나 전문 상담 예약 버튼을 눌러야 한다.
오늘 밤, 마음이 무겁다면 AI에게 먼저 꺼내봐도 괜찮다. 그런데 그 대화 끝에 '이건 나 혼자 해결하기 어렵겠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 느낌을 믿어보자. AI가 건넨 위로보다 당신 자신의 그 직감이 훨씬 더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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