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운동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감독과 코치의 말은 곧 법'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자란다. 칭찬 한 마디에 자존감이 올라가고, 눈 밖에 나는 순간 경기 출전 기회가 사라진다. 그 관계 안에서 '노'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여자배구 정관장 레드스파크스의 A 코치가 선수에게 부적절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고희진 감독이 자진 사퇴했다. 지난 1월 회식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구단이 이를 인지한 것은 5월이었다. 왜 이런 일은 반복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피해자들은 그토록 오래 침묵할 수밖에 없는 걸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권력 의존 함정(power dependency trap)'으로 설명한다. 제니퍼 프렌치 미국 코넬대 조직심리학과 교수는 2021년 스포츠 조직 내 권력 역학 연구에서 하위 구성원이 상위 권력자의 부적절한 행동에 저항하지 못하는 핵심 이유로 '자원 의존성'을 꼽았다. 출전 기회, 추천서, 팀 내 평판 등 자신의 미래가 상대방의 손에 달려 있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항보다 순응을 선택하도록 설계돼 있다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뇌 수준에서도 확인된다. 사회적 위협을 감지하면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이때 전두엽의 판단 기능은 억제된다. 쉽게 말해 '이건 잘못됐다'고 느끼면서도 뇌가 즉각적인 저항 행동을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몸이 굳는 경험, 나만 하는 게 아닌 셈이다.
특히 스포츠 환경은 이 구조가 더욱 극단적으로 작동한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스포츠 인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운동선수 응답자의 47.3%가 지도자로부터 신체적·언어적 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를 외부에 신고한 비율은 8.1%에 그쳤다.
구단이 1월에 벌어진 일을 5월에야 인지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소통 부재가 아니다. 조직심리학에서는 이를 '조직적 침묵(organizational silence)' 현상으로 분석한다. 엘리자베스 모리슨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2000년 연구에서 조직 구성원들이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침묵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로 '말해봤자 달라지지 않는다는 무력감'과 '보복에 대한 공포'를 지목했다.
여기에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도 겹친다. 혼자였다면 신고를 고민했겠지만, 주변에 여러 사람이 있을 때는 '누군가 이미 알리겠지'라는 책임 분산이 일어난다. 1964년 키티 제노비스 사건 이후 심리학자 존 달리와 빕 라타네가 확립한 이 이론은 스포츠 조직 내 폭력 은폐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된다.
더 나아가 팀 스포츠 특유의 '집단 응집성(group cohesion)'이 침묵을 강화한다. 팀의 단결을 깨트릴 수 있는 행동을 구성원 스스로 검열하는 것이다. '우리 팀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정작 팀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보다 앞서버리는 역설이다.
권력형 폭력 피해자들이 신고를 망설이는 또 다른 이유는 '자기귀인 편향(self-attribution bias)' 때문이다. 마리아 바레토 포르투갈 포르투대 심리학과 교수는 2019년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연구에서 응답자의 61%가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가해자보다 자신을 더 강하게 탓하는 것이다.
이는 '공정한 세상 믿음(just world belief)' 이론과도 연결된다. 세상은 공정하다고 믿고 싶은 인간의 심리가, 역설적으로 피해자 스스로 '내가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고 합리화하게 만든다. 그 믿음이 수치심으로 굳어지고, 침묵으로 이어진다.
운동선수들은 여기서 한 가지 부담이 더 얹힌다. 강인함을 덕목으로 훈련받은 이들에게 '피해자'가 되는 것 자체가 자아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정도는 견뎌야 한다'는 스포츠 문화의 강요된 강인함이 결국 피해자의 입을 더 오래 닫아두는 것이다.
구글이 2016년 발표한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 연구는 팀 성과를 가장 강하게 예측하는 요인이 구성원의 능력도, 경력도 아닌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임을 밝혀냈다. 팀 안에서 솔직하게 말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에이미 에드먼슨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정립한 이 개념은 기업을 넘어 스포츠 조직에서도 점점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결국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신고 창구가 있어도, 보복이 두렵고 침묵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문화가 유지되는 한 피해자는 계속 혼자 감당하게 된다. 정관장 사태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단순히 '이번 가해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가 아니다. '우리 조직에서 약한 사람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당신의 주변에도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용기가 아니라, '말해도 괜찮다'고 먼저 건네는 당신의 작은 한 마디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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