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 정도로 힘들다고 해도 되나?', '내가 너무 약한 건 아닐까?' 하며 혼자 삼켜버린 말들. 그 말들이 쌓이고 쌓이다 어느 날 터져버린 경험, 당신에게도 있지 않은가.
배우 엄상미가 최근 방송에서 마약 투약 이후 섬유근육통을 앓으며 '죽고 싶다는 말도 사치라고 느꼈다'고 고백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이 발언은 단순한 연예인의 고백을 넘어, 우리가 고통 앞에서 왜 스스로 입을 다무는지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엄상미의 표현 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사치'라는 단어다. 자신의 고통이 말로 꺼낼 자격조차 없다고 느끼는 심리, 이것은 심리학에서 '고통 비교(pain comparison)' 또는 '고통 무효화(pain invalidation)'라고 부른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심리학과 대처 켈트너 교수 연구팀이 2021년 성인 85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가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 과정에서 뇌는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을 비교해 '나의 고통은 덜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런데 이 비교 자체가 심리적으로 매우 위험한 작동 방식이다. 고통은 절대적 크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자원과 맥락 속에서 주관적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켈트너 교수는 '고통을 비교하는 행위 자체가 회복을 늦추는 핵심 장벽'이라고 강조했다.
엄상미의 경우처럼, 마약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더해진 상황에서는 이 무효화의 강도가 훨씬 커진다. '내가 자초한 일인데 힘들다고 할 자격이 있나'라는 수치심이 고통 위에 덧씌워지는 것이다.
고통 표현을 막는 또 다른 강력한 심리 기제는 수치심(shame)이다. 수치심은 죄책감과 다르다. 죄책감이 '내가 나쁜 행동을 했다'라면, 수치심은 '나라는 존재 자체가 나쁘다'는 느낌이다. 미국 휴스턴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브레네 브라운 교수는 수치심이 높은 사람일수록 도움 요청 행동이 현저히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2019년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강한 수치심을 경험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정신건강 전문가를 찾는 비율이 43% 낮았다.
엄상미처럼 사회적 낙인이 강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은 '나는 동정받을 자격도 없다'는 생각에 갇히기 쉽다. 이 상태에서 '죽고 싶다'는 말은 꺼낼 수 없는 말이 아니라 꺼내선 안 된다고 스스로 금지한 말이 된다. 결국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침묵하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만들어진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침묵이 주변의 오해를 낳는다는 점이다. 힘들어 보이지 않으니 괜찮은 줄 알고, 괜찮은 줄 아니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 고립은 이렇게 조용히 깊어진다.
그렇다면 엄상미가 카메라 앞에서 '죽고 싶다는 말도 사치라 느꼈다'고 꺼낸 고백은 심리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미국 텍사스대학교 심리학과 제임스 페니베이커 교수는 수십 년간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 연구를 통해,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는 행위가 면역 기능 향상, 스트레스 호르몬 감소, 우울 증상 완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밝혔다. 1986년부터 진행된 연구에서, 4일 연속 15분씩 자신의 감정을 글로 쓴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6주 후 심리적 안녕감이 33.1% 높았다.
말로 꺼내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통에 언어를 부여하는 순간, 뇌의 전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되면서 편도체의 과활성, 즉 극심한 감정 반응이 완화된다. '이름 붙이면 길들여진다(name it to tame it)'는 표현이 바로 이 원리를 담고 있다. 엄상미의 고백이 그 자신에게도, 그 말을 들은 시청자에게도 치유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이유다.
한편 공인의 고백은 사회적 파급 효과도 크다. 비슷한 상황에서 침묵하던 사람들이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안도감과 함께 말문을 열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공개적 취약성 모델링(public vulnerability modeling)'이라고 부른다.
엄상미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 꺼내지 못한 말이 있지는 않은가.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라며 혼자 삼키고 있는 감정들. 그 감정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몸 어딘가에 쌓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거창한 고백이 아니어도 된다고 말한다. '요즘 좀 힘들어'라는 짧은 한마디, 혹은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문자 한 줄이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한국심리학회는 고통을 언어화하는 것 자체가 심리적 회복의 첫 단계이며, 전문가 상담이 어렵다면 가까운 사람에게 '요즘 좀 어떠냐'고 먼저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연결의 고리가 생긴다고 안내한다.
당신의 고통은 비교될 필요가 없다. 사치스럽지도 않다. 오늘, 딱 한 문장만 꺼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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