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인데, 어느 순간부터 만나는 게 부담스럽다. 진심을 보여줬는데 돌아오는 건 오해뿐이었다. 관계를 유지하는 일 자체가 일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만 이런 건 아닌가?'
배우 혜리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16년간의 연예계 생활을 돌아보며 인간관계에서 느낀 '회의감과 피로감'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특정인이나 사건을 지목하지 않았지만, 그 고백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건드렸다. 인간관계로 지쳐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혜리가 표현한 이 감정을 '관계 소진(Relational Burnout)'이라고 부른다. 크리스티나 마슬라크 미국 UC버클리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제안한 소진 이론에 따르면, 감정적 자원이 반복적으로 소비되면서 회복이 뒤따르지 않을 때 인간은 관계 자체를 회피하거나 냉소하게 된다. 연예인처럼 수많은 사람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해야 하는 환경은 이 소진을 가속시키는 구조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2022년 미국 심리학회(APA)가 성인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57.3%가 '의미 없이 유지하는 인간관계에서 피로를 느낀 적 있다'고 답했다. 특히 직업 특성상 관계를 '관리'해야 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우 일반인보다 관계 소진 경험 비율이 22% 더 높게 나타났다.
혜리가 언급한 '회의감'은 단순한 피곤함이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관계에 투자한 감정적 에너지 대비 돌아오는 보상이 지속적으로 불균형하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신호다. 즉, '내가 이만큼 주는데 왜 이렇게 소진될까'라는 감각이 쌓인 결과인 셈이다.
로버트 치알디니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심리학과 명예교수가 제시한 '호혜성 원칙'에 따르면, 인간은 상대에게 무언가를 받으면 돌려줘야 한다는 강한 심리적 압박을 느낀다. 그런데 유명인을 둘러싼 관계에서는 이 호혜성이 심각하게 왜곡된다. 상대방이 '당신'이 아닌 '당신의 인지도와 영향력'을 원하는 경우, 진심 어린 교류처럼 보이는 관계가 실제로는 철저히 도구적인 관계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뇌는 새로운 관계에서도 '이 사람도 나를 이용하려는 건 아닐까'라는 방어 기제를 작동시킨다. 대인 불신이 만성화되는 것이다. 2021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정신건강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장기간 도구적 관계에 노출된 사람들은 진짜 우정과 이해관계형 관계를 구별하는 능력이 저하되고, 이는 고립감과 우울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67%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혜리가 구체적인 누군가를 지목하지 않은 채 '피로감'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문제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관계 자체의 구조였던 것이다.
인간의 뇌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관계 스키마(Relational Schema)'를 형성한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동으로 적용되는 일종의 관계 해석 틀이다. 앨버트 밴두라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의 사회학습이론에 따르면, 초기에 형성된 관계 패턴이 수년간 강화되면 그것이 유일한 대인 방식으로 고착될 수 있다. 혜리처럼 10대 후반부터 대중과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쌓아온 경우, 피로와 경계심이 기본 세팅처럼 자리 잡기 쉽다.
그래서 오랜 시간 한 직업 환경에 있던 사람이 '이 관계가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갑자기 던지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심리적 반응이다. 억눌려 있던 관계 피로감이 어느 임계점을 넘어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관계 재설정 시그널'이라 부르기도 한다.
관계 소진은 연예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에서 억지로 유지하는 관계,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놓지 못하는 인연, 만날 때마다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드는 사람. 당신 주변에도 한두 명쯤은 떠오르지 않는가. 심리학자들은 관계의 숫자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틴 셀리그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교수의 웰빙 이론 PERMA에서도 긍정적 관계는 행복의 핵심 요소로 꼽히지만, 그 전제는 '소모적이지 않은' 관계다.
혜리의 고백은 단순한 연예인의 넋두리가 아니다. 관계에 지쳤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더 건강한 관계를 향한 첫걸음이다. 지금 당신 곁의 관계들을 한번 조용히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나를 채워주는 관계와 나를 비워가는 관계를 구별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조금 더 가벼워질 수 있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sytimes.co.kr/news/view.php?idx=13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