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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스펙을 쌓고, 자격증을 따고, 포트폴리오를 정리했다. 그런데 채용공고를 열어보니 이번엔 'AI 활용 능력'까지 요구한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제 뭘 더 해야 하지?'
HR테크 플랫폼 잡코리아가 최근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기업 채용공고의 우대사항이 5년 새 눈에 띄게 세분화되고 구체화되고 있다. 직무 역량 중심의 수시 채용 트렌드에 AI 기술 확산까지 맞물리면서, 취업준비생이 감당해야 할 '스펙 목록'은 해마다 길어지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자격 과잉 요구(credential inflation)'라고 부른다. 실제 직무 수행에 필요한 역량보다 훨씬 많은 조건을 요구받을 때, 지원자는 자신이 영원히 부족한 사람처럼 느끼게 된다. 미국 미시간대학교 심리학과 크리스토퍼 크랜들 교수 연구팀이 2022년 성인 구직자 82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채용 요구사항이 많아질수록 지원자의 자기효능감은 평균 41.3%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기효능감이란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흔들리면 도전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실제로 해당 연구에서 요구사항이 10개 이상인 공고를 접한 구직자의 58.7%는 '지원 자격이 안 된다'고 느껴 아예 지원을 포기했다고 응답했다.
문제는 포기가 단 한 번의 공고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복적으로 '부족한 나'를 확인하는 경험은 학습된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이 굳어지는 것이다.
학습된 무력감은 미국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심리학과 교수가 1967년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반복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실패를 경험하면, 실제로 상황이 바뀌어도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취업 시장에서 이 이론은 섬뜩할 만큼 정확히 들어맞는다.
채용 요구사항이 계속 바뀌고 늘어나는 환경에서, 구직자는 자신의 노력이 결과를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오늘 AI 활용 능력을 키웠더니 내일은 또 다른 조건이 추가된다. '열심히 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조용히 뿌리내리는 것이다.
국내 연구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확인된다. 한국고용정보원이 2024년 청년 구직자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2.4%가 '취업 준비 중 무력감을 자주 느낀다'고 답했다. 특히 지원 경쟁률이 높고 요구사항이 많은 대기업 취준생일수록 이 비율은 71.8%까지 높아졌다.
요구사항이 많아진 채용 시장에서 취준생을 더 힘들게 하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소셜미디어 속 넘쳐나는 '합격 후기'다. 레온 페스팅거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교수가 제시한 사회비교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해 자신의 능력과 위치를 평가하려는 본능적 경향이 있다.
문제는 SNS에서 보이는 비교 대상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합격 인증, 연봉 공개, 이직 성공 스토리는 알고리즘에 의해 더 많이 노출된다. 반면 수십 번의 서류 탈락, 면접 실패, 긴 공백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취준생은 '나만 이렇게 힘든가'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마야 타미르 심리학과 교수팀이 2023년 발표한 연구에서, SNS를 하루 2시간 이상 사용하는 구직자는 그렇지 않은 구직자보다 자기비하적 생각을 33.1% 더 자주 경험했다. 비교의 덫은 스펙 부족보다 마음을 더 빨리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이 압도적인 채용 시장에서 마음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심리학자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첫 번째 방법은 '통제 가능한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다. 오늘 공고 100개를 검색하는 것보다, 한 개의 자기소개서를 완성하는 작은 성공 경험이 자기효능감을 되살린다.
두 번째는 비교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타인의 합격 스토리가 아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훨씬 건강하다. 셀리그먼 교수는 긍정심리학 연구에서 '작은 진전을 인식하는 것'이 학습된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채용공고 속 긴 요구사항 목록 앞에서 한숨이 나온다면, 잠시 창을 닫아도 괜찮다. 오늘 내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의 가치는 채용공고 우대사항 목록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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