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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 - 거식 폭식 행위의 이면에 대하여
  • 기사등록 2021-07-26 10:13:33
  • 기사수정 2021-07-26 10: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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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십 대에 10년간 거식 폭식에 잠식되어 살았다.


이십 대를 거식 폭식으로 꽉 채운 셈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온갖 방향에서 접근하며 수많은 시도를 해보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나는 여대를 다녔는데, 이는 그만큼 젊은 여성을 마주칠 기회가 많았다는 뜻이다.


수많은 여대생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학교 화장실에서 다른 학생이 구토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 한 켠으로나마 위안을 삼았다. '나만이' 겪는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에. 내가 겪고 있는 증상이 사회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병이라는 사실에. 언젠가 꺼내 볼 수 있는 객관화된 아픔이라는 사실에.




시작은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대학 입학 후 여러 대학교가 연합한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학생 수가 굉장히 많고 규모가 컸다. 그러다 보니 연령대도 다양하고 배경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이미 졸업한 사회인들도 함께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회초년생인 그들은 마음껏 후배들을 거느리며 살던 학생 때와 달리 직장에서 받는 압박에 시달렸고, 잃어버린 자유와 통제 욕구를 대학 동아리로 돌아와 펼치고 싶어 했다.


그렇게 나이도 많고 하늘 같은 선배 중 하나가 학생 동아리의 회장을 맡았다. 나는 회장이 이끄는 총단에서 함께 일을 하게 되었고, 예상하던 것과 달리 주먹구구식인 경험에 만족하지 못해 더 이상 함께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서 관계의 문제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위치와 업무에 대해 평가절하 당했다고 생각한 회장은 수백 명의 학생들 사이에서 나를 따돌리려고 애썼다. 모든 모임에 참석해 내가 그 자리에 함께하는 동안 그 상황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SNS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든 학생들에게 접근해 내가 나타나기 불편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같은 학생 신분이었던 친구들은 양쪽 모두를 이해했지만 회장이 워낙 강한 사람이었던지라 그 누구도 이 상황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아 했다.




스무 살, 태어나 처음 겪는 관계 문제에서 나는 모든 통제력 -사회적인, 그리고 내 감정에 대한 통제력- 을 잃었다. 한두 명의 사람을 잃는 것이 아니라 백여 명의 지인을 잃는 상황이었다. 거기서 지지 않으려고 버텼다. 늦은 밤, 혼자가 되면 닥쳐오는 불안과 분노를 다스릴 방법이 없었다.


관계와 내 감정에서 잃은 통제력과 나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인식은 내 몸에 대한 통제력으로 삐뚤게 행사되었다. 몸이 비워지면 머리가 맑아진다. 먹지 않은, 속이 가벼운 상태에서 카페인을 조금 마시고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이 나에게 가장 또렷하고 충만한 순간이었고, 그것을 영원히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식욕은 그보다 본능적이고 강하다. 몸은 영양소를 강하게 갈구하고 너무 오래 참으면 본능은 폭주한다. 며칠에 한 번 꼴로 폭식이 이어졌고, 폭식 후 배가 부른 상태를 견디지 못해 구토했다. 배가 부르면 나 자신이 우스꽝스럽고 멍청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혼자 하는 자취생활은 상황을 악화시키기에 완벽했다. 몸이 제대로 된 영양을 흡수하지 못하자 식욕에 대한 집착은 더 강해져 갔다. 조금이라도 영양가 있는 것들-집밥-을 먹었더라면 몸이 그만큼 강한 식욕을 내보내지 않았을 텐데, 음식이라고 먹어봐야 커피, 김밥, 초콜릿 몇 조각이 다였다. 몸이 축날수록 몸은 칼로리 높은 것들, 기름지고 단 것들을 탐했다.


참고 참다가 하루 날을 정해 치즈케이크, 빵, 과자, 치킨 등 5000칼로리에 육박하는 것들을 한 번에 먹었다. 먹지 않고 버티다 영양가 없이 칼로리만 높은 것들을 갑자기 먹으니 몸은 엉망이 되어갔지만 몸무게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먹는 것은 부족한데 몸무게는 줄지 않으니 운동에도 집착했다. 배에, 허벅지에 살집이 잡히는 것을 스스로 보고 있자면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것은 ‘마른 것이 예쁜 것’이라는 인식과는 조금 달랐다.


푹 퍼진, 완벽하지 않은 몸은 멍청하게 느껴졌다. 내 몸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순간만이 나의 자존감을 얄팍하게나마 유지시켜주었다. 내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가 가치 없다고 느낄 때, 분노와 불안을 잊기 위해서 거식과 폭식을 반복했다. 그것은 내 불안과 공포를 다스리기에 가장 빠르고 쉬운 방어기제였다.


"얼마나 적게 먹어야 할 것인지 칼로리를 계산하면서
내가 바르고 정돈되었다고 느꼈고,
반대로 언제 어떤 음식들로 폭식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집중하는 동안
나의 불편한 감정들을 파묻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순간에는 식욕과 마음이 모두 통제되었다. 적절히 먹고 밝게 행동했다. 하지만 혼자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미친 듯이 사람들을 만났고, 활동했고, 하루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했다. 그래야만 내가 그 순간들에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완벽하지 않은 내 몸뚱이와 직면해야 하는 순간들은 외롭고 비참했다. 혼자 있을 때 파고드는 감정들 -내가 뱉은 말과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 실수했을까 걱정하는 두려움, 내가 누군가에게 가진 분노-를 대면하고 다스릴 수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멍청하고 바보 같은 나의 자존감을 찾기 위해 똑똑한 일들을 끝없이 찾아내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거식 폭식증은 심리적인 문제에서 신체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일이다. 심리학에 푹 빠져있던 이십 대 시절에는 심리적 접근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심리치료일을 하면서 교수님과 동료 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자가치료를 진행했지만 크게 효과가 없었다.


몸이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위장은 소화기능을 잃었고, 식도는 혈관이 터져 피가 스며 나왔다. 구토를 반복하자 위경련이 수시로 일어났다. 몸은 음식을 갈구해 폭식이 이어졌지만 소화는 불가능했다. 물리적으로 영양이 부족한 상태는 몸을 허하게 만들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공허한 상태를 만들었다.


게다가 완벽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직업이었던 심리치료는 내게 매 순간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다. 무가치한 나를 채우기 위해 하는 일들인데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지 않으니 점점 더 자존감이 낮아졌다. 그럴수록 더 이를 악물고 일했고 쉬지 않았다. 힘들수록 거식 폭식의 주기는 더 짧아졌고 이 악순환은 내 인생을 망치기에 충분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명확한 결과물이 나오는 일과 나 스스로도 사랑해주지 못하는 내 몸을 사랑해주고 인정해주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스트레스 상황을 벗어나 유학을 가겠다고 일을 그만두고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시험 점수를 따는 일은 분명한 결과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하루 4시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는 루틴은 내가 긴장을 늦출 여지를 주지 않았다.


졸리지 않으려 사람들과 함께 적은 양을 먹었고, 일분일초를 낭비하지 않고 공부했다. 폭식을 할 만한 시간적, 심리적 여유를 만들지 않았다. 적게 먹어도 영양가가 조금이라도 흡수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몸은 정상을 되찾아갔다. 더 이상 식욕이 폭발하거나 허기짐에, 공허함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함께 미래를 꿈꾸며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은 내게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높아진 자존감은 실력으로 이어졌고, 좋은 결과를 얻으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며 공허감 또한 지울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찾게 된 후에는 내가 찾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고, 혼자 있을 때의 고독감과 공허함은 오히려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거식 폭식증은 마른 몸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우리 사회의 편향된 시각에서 비롯된 병 이기는 하다. 마른 것이 아름답다는 사고방식에 맞추어야 완벽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이 겪고 있는 증상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마른 몸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식 폭식은 불편한 감정, 외로움, 어려운 일들에 대해 대처하는 방어책-도망칠 구멍-이다.


그 방어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게임이 될 수도 있고, 영상물, 운동, 술, 담배, 마약 등 중독될 수 있는 모든 행위가 방어기제가 된다. 그중에서도 음식은 담배 혹은 술처럼 완전히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면서 연속이기 때문에 좀 더 다루기가 어렵다. 거식과 폭식의 적정선을 스스로 정하는 것조차 불분명하기에 '완치'라는 개념보다 '늘 관리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내 상처와 감정을 중독성 있는 무엇인가로 덮고 잊으려 하면 상황은 악화된다. 중독적인 행위를 끊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내 감정을 먼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심리학에 더 파고들었다. 발가벗겨진 내 내면을 대면하면서 같은 방식으로 타인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타인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쁘게 생각하든 좋게 생각하든-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외롭거나 공허하지 않았다. 자존감이란 나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지 타인이 떠받들어주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다.


중독적인 행동 -거식 폭식-은 중단되었고 나는 좀 더 건강한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결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운동, 글쓰기, 공부와 같은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방법 상의 변화였을 뿐 내 감정을 제대로 대면하고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것은 아직도 어려웠다. 화가 나는 일이 생겨도 뒤늦게 감정을 발견했고, 울고 싶어 져도 왜인지 스스로 잘 깨닫지 못했다. 관계에서 생겨나는 감정과 스트레스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중독적 방어기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선의 조처였다. 돈이나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즐겁다고 생각하는 직업을 택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지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평안을 꿈꾸며 결혼을 했다. 하지만 예상치 않게 인생의 큰 굴곡을 새로운 가족과 함께 겪었다. 나의 이십 대가 거식 폭식을 극복하기 위한 10년이었다면, 나의 삼십 대는 아픈 가족들의 병을 극복하게 하기 위한 10년이었다. 아토피 또한 섭식 행위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질환이었다. 결국 치료방식도, 겪은 과정도 비슷했다. 나는 다른 시각에서 같은 과정을 또 한 번 겪는 셈이었다. 서로를 너무나도 깊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한계치의 시간들을 함께 하며 감정의 바닥까지 서로 다 드러냈다. 나는 처음으로 울고 웃고 화내고 소리치고 다시 껴안으며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직면하는 경험을 했다. 세상 처음으로 겪어보는 관계였다. 그렇게 서로 바닥을 보이고도 우리는 더욱 단단해졌고, 서로에게 의지했다. 예전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에게는 완벽하지 않은 모습, 나의 못난 부분을 드러낼 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나를 싫어하리라는 본질적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이 내 가족을 통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었다. 급기야 나는 나의 상처와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고, 남들 앞에 서서 강의를 했다. 이십 년 전에는 내 감정을 스스로 덮으려 거식 폭식 등의 중독적인 행위에 빠져있었다. 이제는 그것을 타인들에게 공식적으로 내놓고도 남의 이목과 평가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나의 십 년, 그리고 우리의 십 년이 지나간다. 다음 십 년의 주기에 앞서 우리는 새로운 가족-아가-를 맞았다. 태어난 지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우리와 다르게 크고, 건강하고, 강하다. 다음 십 년 주기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우리 네 가족의 삶은 퍼즐처럼 맞물려 있다.


나의 뼈아픈 경험이 다시 반복되는 일없이 아이들의 단단한 뼈대가 되기를 소망하며 하루하루를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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