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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불행하다는 '사실'에 대한 고찰 - 행복도 측정에 대한 문화심리학자의 딴지
  • 기사등록 2021-07-27 09: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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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불행하다.



이 말은 언젠가부터 반박할 수 없는 명제처럼 통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행복연구에서 일관적으로 낮게 보고되는 한국인들의 행복도를 보면서 우리는 사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연구결과가 그렇다는데 안 믿을 수 있겠는가.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방송에 나오는 학자들은 한국인들은 불행하다는 전제에서 그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 여념이 없다. 한국인들이 불행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거기에 의심을 품는다는 자체가 식견이 짧고 불경(?)스런 시도로 간주되는 현실이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불행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주변을 살펴보면 불행할 일 밖에 없다. 어떤 이론이나 도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도식에 맞는 정보만을 받아들인다.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불행하다고 결론짓기는 아직 이르다. 우선 한국인의 행복이 낮다는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은 다행 행(幸)에 복 복(福)자로 이루어져있지만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원래부터 있던 말이 아니다. 1800년대 후반 일본에서 happiness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표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Happiness가 행복이라는 한자로 바뀌면서 행복에는 한자 문화권의 문화적 의미가 덧붙는다. 문자 그대로 행복이란 우연히 찾아오는 좋은 일(행 幸)과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좋은 일들(복 福)을 뜻한다.


우연히 찾아오는 행운이란 길을 걷다가 만원짜리를 줍던가 소개팅을 나갔는데 이상형을 만나는 따위의 일들이다. 또한 복(福)은 전통적으로 오복(五福)을 뜻하는데, 즉 복이 많다는 말은, 오래 살고(수 壽), 명예를 얻고 (귀 貴), 돈을 많이 벌고(부 富),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평안하며(강녕 康寧), 자손이 많아야 한다(자손중다 子孫衆多)는 뜻이다.


즉,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매사에 좋은 일이 끊이지 않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건강하고 마음 편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고루 충족되어야 한다는 얘긴데 누구나 이런 삶을 살기 바라지만 그러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한국문화에서의 행복은 나 개인의 것만이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세계의 문화를 크게 미국이나 서유럽과 같은 개인주의 문화권과 동양의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구분한다. 물론 한국은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집단주의 문화에서 개인의 위치는 타인의 존재에 의해 규정되는 경향이 있다.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이미지 출처: 한국일보


나의 행복이 나의 현재 상태에 의해 판단되는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는 내가 밤에 잘 자고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나서 기분이 좋으면 누구든지 ‘I'm happy!’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잘 자고 일어나 상쾌하게 하루를 준비하다가도 ‘아버지의 어려운 회사사정’이나 ‘어머니의 건강’, ‘군대 간 남동생’이라도 떠오르게 되면, 짧은 순간 느꼈던 행복마저 미안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문화에서 행복은 어떤 일시적인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나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등의 속담에서 나타나듯이 한국인들은 일시적인 상태로 개인의 행복을 평가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가 쓰는 행복이라는 말은 Happiness는 그 쓰임과 느낌이 전혀 다르다.  




이러한 행복의 주관성은 행복한 상태에 대한 객관적인 비교와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다니엘 길버트는 누구의 행복이 더 크고 작다는 판단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Daniel Gilbert


태어날 때부터 신체 일부가 붙어서 태어난 샴 쌍둥이들은 자신들이 아주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하는 10점 만점에 8만큼의 행복이 우리의 8과 같은지는 영원히 밝힐 수 없는 문제다.


유발 하라리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우리는 행복에 대한 과학적 정의나 이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척도를 갖고 있지 않다. 

의식의 신비를 풀지 못하는 한 우리는 행복과 고통의 보편적 척도를 개발할 수 없고 

서로 다른 종은 고사하고 서로 다른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을 비교하는 방법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연구를 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학자들은 저마다 느끼는 지점이 다른 행복을 측정하기 위해 SWB를 개발했다. SWB는 삶에 대한 만족도 5문항과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정서를 묻는 20문항..으로 되어있는데, 문제가 되는 건 정서 부분이다.


SWB의 정서문항들은 긍정적 정서 10문항과 부정적 정서 10문항 총 20문항으로 측정되며, 긍정적 정서 문항 점수의 합계에서 부정적 정서 점수를 뺀 것을 사용한다. 이를 삶의 만족도 점수와 더한 것이 주관적 안녕감 점수다. 이렇게 연구(측정)를 위해 어떤 개념을 정의하는 것을 조작적 정의라고 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조작적 정의는 실제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정서를 어떻게 느끼느냐는 행복의 측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의에 따르면 긍정적 정서를 많이 느낄수록 행복할테니 말이다. 만약 문화적으로 긍정적 정서를 덜 표현한다든지(덜 표현한다는 것은 덜 경험한다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 정서를 부정적 정서와 덜 구분한다든지 하면 그런 문화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히 덜 행복한 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개인주의 문화 사람들은 집단주의 문화에 비해 정서의 표현이 크고 긍정적 정서에 민감하다. 개인주의 문화란 행동의 준거(기준)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의미이며 개인은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독립적 존재로서 행동하고 또 그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개인주의 문화 사람들의 행동은 개인적 만족이나 성취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정서도 이와 관련한 정서를 경험하기 쉽다.


반면, 집단주의 문화 사람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정서표현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고, 수치심 등의 부정적 정서에 민감하다. 또한 ‘아픈만큼 성숙한다’처럼 부정적 정서를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새옹지마나 화무십일홍..등의 고사성어에서 알 수 있듯이 행복이란 오랜 시간을 두고 평가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또한 정서 경험 방식에 있어서 어떤 문화에서는 긍정적 정서와 부정적 정서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상대에 대한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혼재된 ‘애증(愛憎)’이나 ‘미운 정 고운 정’, 눈물과 환희가 공존하는 ‘한과 신명’ 등 어떠한 감정을 경험함에 있어서 긍정과 부정을 명확하게 구분 짓지 않는다. 지겹고 짜증나는 사람일지라도 막상 가버리고 없으면 섭섭한 감정을 표현하는 ‘시원섭섭하다’는 말은 그 단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양가적 감정표현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정적 정서와 부적 정서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거나 혹은 척도에서 유도하는 방식의 응답 이상을 하기가 어렵다. ‘재미있는-지루한’, ‘즐거운-비참한’, ‘가치있는-쓸모없는’ 등의 형용사 사이의 적당한 지점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의 정서경험 방식과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 때문에 항상 개인주의 문화의 행복이 집단주의 문화보다 높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결과는 개인주의가 집단주의보다 우월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정서경험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적지 않은 행복연구자들이 한국인들이 불행한 이유를 집단주의에서 찾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개인주의 문화가 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인주의 문화라고 해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행복해 보일 뿐’이다.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개인이 독립적 주체로 행동하기 기대하므로 개인은 늘 독립적으로 잘 기능해야 한다는 압력이 주어진다. 개인주의 문화권 사람들(특히 미국인)이 fine, good, couldn’t be better 등 긍정적 정서 표현에 민감한 것은 그 때문이다.



개인주의 문화에서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이들은 패배자(loser)라 불리며 사람들은 그렇게 될까봐 불안에 시달린다. 이는 집단주의 문화 사람들이 집단의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고 집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튀는 사람’ 취급받는 것과 정확히 대응하는 현상이다. 대신 집단은 구성원들의 생존을 도우며 사회적 지지를 제공한다.


나는 우리가 알고 봤더니 행복하더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불행하다고 제시되는 증거들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인이 불행하다는 '사실'은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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