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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선안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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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지인과 친구 사이의 누군가와 오랜만에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와 통화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마음이 깔깔해졌는데 그의 말과 말투가 조금 딱딱하고 뾰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다 보니 또 그 딱딱함과 뾰족함이 나의 미묘한 잔상에 가깝다 보니, 나는 이 마음을 한동안 잊고 있다가 또 그를 마주하면 그 잔상에 물결처럼 진동하다, 결국은 또 잊고 마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그와 나 사이에는 그저 평행선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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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그랬다. 전화 통화를 하다가, 종이에 손을 베일까 염려하듯 조금은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눴는데, 통화를 마칠 즈음 그가 급하게 전화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전화할게."


딱히 다시 할 이유는 없었지만 다시 한다는 말에 기다렸던 것도 아니고 기다리지 않았던 것도 아닌 채로 시간이 지났는다.


꼭 하루가 지난 후에 그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가 잊지 않고 한 두 번째 전화는 그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 역시 조금은 바꾸어 주었다. 그래서 고마운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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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화의 시작을 그는 이렇게 했다.


"사실은 내가 있잖아.. 전부터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말이야.."


그가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란, 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 속에 나에 대한 마음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나를 믿고 하는, 자신의 힘겨움, 어려움, 상처와 절망에 대한 이야기였고, 나에게 닿기 위해 말 고르기 끝에 고심해서 건네는 진심의 말이라는 것이 느껴졌었다.


그가 나를 선택해주어 고마웠고 내가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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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하나의 판을 거치게 되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과 일상적으로 하는 말을 가르게 되었다. 한 사람의 마음이 묻어있는 고유한 말과 그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보편의 말을 구분하며 듣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가 지쳤을 때 하는 말, 화났을 때 하는 말, 슬픔에 젖어하는 말, 상처에 아파서 하는 말은 어쩌면 그 사람의 말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사람의 말이 아닌 그 사람의 상처가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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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통화를 반복할 때에 나는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고 자주 그를 오해했었다. 뾰족하고 딱딱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 뾰족함과 딱딱함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의 마음이 투명하게 내 안에 들어왔고 이해한다는 의식도 없이 그대로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우리가 누군가의 진짜 말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란, 그 사람이 말할 준비가 되었을 때라고.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대화의 몫이란, 말할 준비가 된 사람이 나에게 마음껏 말할 수 있도록 들을 준비를 해두는 것, 언제라도 잘 들을 수 있게 귀를 열어두는 것이라고.


두 번째 통화를 할 수 있도록, 서로에게 진심을 말하고 듣고 또 말하고 들을 기회를 주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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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는 말을 살펴보다 보면 타인의 반응에 상처 받는 일도 줄어든다.


작정하고 한 말이 아니라면, 그가 준비해서 한 말이 아니라면, 그런데 우리가 그의 말에 상처 받게 된다면, 우리는 그의 말을 구분하고 갈라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진심이 아니라 그의 상처나 그의 결핍, 그의 관성이 쏟아내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 말이 도달하고자 했던 도착지가 애초부터 내 마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사람들이 지쳐서, 힘들어서, 상처 때문에 하는 뾰족한 말에 영향받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흔들리 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 흔들림의 진동으로 그와 나 사이에 살짝 거리를 두었다가, 내 마음을 한번 더 살폈다가 다시 내 마음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균형의 순간, 서로의 상처가 아닌 서로의 진심과 손을 잡을 것임을 선택할 수도 있다면 결국 우리는 더 많은 진심을 듣고 말할 기회를 서로에게 선물해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결국, 우리가 진심을 말하고 들을 때란, 서로가 '준비되었을 때'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대화가 두 번째 통화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더 많은 대화가 두 번째 통화와 같기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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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1-19 08: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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