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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구겨진 채 놓인 종이 더미. 터덜터덜 걸어가 종이를 주워들고 펴본다. 첫 페이지의 맨 위에는 ‘이력서’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로 빼곡히 적힌 글자들이 그 뒤로도 몇 페이지나 이어진다. 고등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에 발 디디자마자 쌓아온 스펙들. 수없이 반복된 시험과 탈락을 거치며 이력서는 두꺼워져 왔다.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꿈에 대한 확신과 열정은 이미 흐려졌다. 지친 몸과 마음을 다그치며 이력서를 채워나가게 하는 동력은 이제 불안으로 바뀌었다. 토익 점수와 자격증 개수, 대외활동과 동아리 활동 경력의 집합체, 이것이 지금 나의 모습이다. 



고질적인 사회 현상으로 자리잡은 취업난은 코로나19 시국을 맞아 더욱 악화하고 있다. 2020년 들어 취업자 수는 전년 대비 20만 명 이상 감소했다. 일자리는 없고 취업준비생은 줄을 서는 상황. 줄의 앞쪽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학업 외에 자신을 차별화할 수 있는 경쟁력, 소위 스펙을 쌓아야 한다.


요즘 들어 SNS에 대외활동용 계정을 따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3대 스펙(학벌, 학점, 토익 점수)에서 5대 스펙(어학연수, 자격증 추가), 더 나아가 8대 스펙(봉사, 인턴, 수상경력 추가)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지금의 현대사회는 ‘스펙경쟁 사회’다.


스펙 쌓기가 직장에서의 업무능력 향상을 위해서 이뤄진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취업준비생들은 취업에 유리한 이력 그 자체만을 위해 스펙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스펙경쟁 시대에 취업준비생들이 느끼는 우울과 스트레스, 불안은 가중되었다.



한 설문에 따르면 절반에 가까운 대학생들이 스펙을 쌓는 이유로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이들은 확고한 목적과 목표 없이, 불안함에 그저 남을 따라 이런저런 스펙을 채워가고 있다.


2020년 발표된 한 논문은 취업준비생들의 스펙 쌓기 현상을 ‘강박적 자기계발’로 정의하고 이러한 행동이 그들의 여러 심리적 요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해당 연구의 결과는 과열된 스펙경쟁 분위기가 지속되어도 괜찮을지 물음표를 던진다. 


허창구의 「스펙경쟁 사회에서 자기계발 동기와 자기계발 강박이 취업준비생의 심리상태에 미치는 영향」은 취업준비생의 자기계발(스펙 쌓기) 동기를 향상적‧예방적‧강박적 3가지로 분류했다. 



향상적 자기계발: 능동적으로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기계발

예방적 자기계발: 취업 실패 등 부정적 결과를 피하기 위해 자기계발

강박적 자기계발: 취업불안을 없애기 위해 지나치게 반복해서 자기계발



또한, 각각의 자기계발 동기에 영향을 받는 심리적 요소로 취업불안‧진로성숙도‧진로결정수준‧진로준비행동‧내면적 편견‧삶의 만족도를 제시했다. 



취업불안: 취업을 앞둔 사람들이 취업준비 과정에서 느끼는 불안

진로성숙도: 한 개인이 자신과 직업 세계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고 계획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 발달 정도

진로결정수준: 대학졸업 이후에 일과 관련한 자신의 진로결정과 확신 정도

진로준비행동: 진로목표의 설정 및 자신이 설정한 진로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개인이 행하는 다양한 준비 활동

내면적 편견: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것이 향후 자신의 취업 과정에서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자신의 불이익을 감소시키기 위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반응하거나 냉담하게 반응하는 것

삶의 만족도: 본인이 생각하는 삶의 질에 관한 주관적인 평가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향상적 자기계발은 취업불안을 줄이고, 진로성숙도를 높이고, 진로결정수준을 높이고, 진로준비행동을 높이고, 삶의 만족도를 높인다.

2. 강박적 자기계발은 취업불안을 늘리고, 진로성숙도를 낮추고, 진로결정수준을 낮추고, 내면적 편견을 늘리고, 삶의 만족도를 낮춘다.

3. 예방적 자기계발은 연구자들의 예상과 달리 부정적인 영향을 보이지 않았다.


해당 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하다. 능력과 경험을 쌓기 위해 스펙을 추구하면 심리적으로도 건강해지고, 반대로 불안 때문에 강박적으로 스펙을 추구하면 심리적 악영향을 받는다.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진로가 더 불확실해지며, 편견은 늘고 삶의 만족도는 떨어지는 것이다. 


강박적으로 모은 이력은 허울에 불과할 뿐이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실패에 지나치게 좌절하게 만든다. 스펙 쌓기와 취업 준비에 지쳐 세상을 등지는 청년의 소식에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왜 우리는 이토록 강박적으로 스펙을 쌓게 된 걸까? 어떻게 하면 스펙 경쟁 사회에서 강박적 자기계발 동기 대신 향상적 자기계발 동기를 가질 수 있을까? 이어지는 기사에는 이 두 질문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통해 얻은 대답을 담았다. 






기자 : 송하민, 양원준, 정윤경 기자





<참고문헌>

허창구, 2020, 「스펙경쟁 사회에서 자기계발 동기와 자기계발 강박이 취업준비생의 심리상태에 미치는 영향」, 『한국심리학회지: 산업 및 조직』 33(1)

e-나라지표, https://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063

안수정, 「취준생 64.5% "마구잡이스펙 쌓아"」, 『잡코리아』. 2017.4.7., https://www.jobkorea.co.kr/goodjob/tip/view?News_No=11928&schC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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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11-25 18: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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