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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김혜령 ]


최근에 이직을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퇴근길에 기분이 싱숭생숭하여 서점에 가려는데, 책을 추천해달라는 것이었다. 내성적인 성격의 그녀는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꽤 긴장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떠오르는 대로 세 권의 책을 불러주었지만 나는 그 책들이 몇 페이지 넘어가지 못할 거란 것을 안다. 사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위한 작은 조치다. 이를테면 서점에서 책 한 권을 손에 꼭 쥐고 나오기, 혹은 고민이 많아지는 한밤중 침대에 반쯤 누워 책장을 뒤적거리기. 마치 아이가 자기 전에 보드라운 이불 끝을 만지작거리다 잠들 듯이 말이다.



이렇게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 있다. 친구를 만나고, 모바일게임에 빠지고, 애인을 괴롭히거나, 쇼핑을 하기도 한다. 책을 사거나 읽는 것 또한 그중 하나일 것이다. 모습은 제각기 다양하겠으나 향하는 곳은 같다. ‘마음의 안정’이라는 집.



낮에 쓰는 가면


나는 ‘차분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 차분한 모습이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 가면이라는 것을 안다. 쉽게 긴장하고 불안해하고 서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만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차분해 보이고 싶은’ 사람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낮에는 직장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고 밝은 모습이었다가 늦은 밤 멍하니 있을 때면 혼자 고민하는 사람. 퇴근길에 밀려오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서점으로 향하는 사람. 낮의 그녀와 밤의 그녀는 다른 사람일까? 그리고 이것이 단지 그녀에게만 보이는 모습일까?



상처 받은 아이를 발견하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가끔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 순간을 마주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될 때는 특히 그렇다. 그 순간을 위해 나의 감정과 행동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내면아이(inner child)’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린아이가 한 명씩 살고 있다. 이 아이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처럼 존재한다. 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들은 이 존재를 ‘내면아이’ ‘내면 안의 아이(child within)’ ‘신성한 아이(the divine child)’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설명한다. 이 내면아이는 한 개인의 인생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데 특히 스트레스 상황에서 불안, 겁, 자기의심으로 감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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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아이 치료전문가인 존 브래드쇼(John Bradshaw)에 의하면 내면아이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포함한다. 부정적인 측면을 ‘상처 받은 내면아이’라고 하는데, 치료의 핵심이 되는 개념도 이 부정적인 측면이다. 이 상처 받은 내면아이를 치유하지 않고 계속 품고 있을 때, 심리적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브래드쇼는 사람들이 겪는 모든 불행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아직 치유되지 않은 내면아이로 인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그 내면아이를 발견하고 돌보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성인이 된 우리의 인생에 계속적인 악영향을 끼치면서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내면아이가 지닌 상처를 이해하고 돌본다면 ‘놀라운 아이(wonder child)’가 대신 자리 잡게 된다. 이 놀라운 아이는 내면아이의 긍정적 측면으로, 인간의 창조적 에너지의 근원이다.


세상에는 이런 놀라운 아이의 힘으로 창조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들이 있다. 오프라 윈프리가 대표적이다. 현재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동시에 토크쇼로 많은 이들을 치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녀의 유년시절은 그야말로 상처투성이였다. 불우한 가정사와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성적학대로 열네 살에는 미숙아를 사산하는 일을 겪는다. 그러한 치명적인 시련으로 그녀의 내면아이는 병들어 있었다. 만약 그 아이를 모른 체하고 돌보지 않았다면 많은 여성들에게 선한 에너지를 주고자 노력하는 지금의 윈프리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내면아이와 대인관계


그렇다면 어린 시절에 치명적인 상처가 없는 경우 모두 튼튼한 자아를 갖게 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내 성장과정은 순탄했다’고 속단하거나 ‘나의 내면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넘겨짚는 데서 내면아이는 소외될 수 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성장하는 동안 부모의 미성숙한 인격이나 섣부르게 강요된 성숙, 형제관계에서의 무의식적인 압력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아왔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어린 시절의 자아는 결핍에 취약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내면아이가 인간관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불안과 우울 같은 정서적인 문제의 많은 부분이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사실이겠다. 내면아이를 숨기면 숨길수록 타인과 상처를 주고받거나 고통스러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서너 살짜리 아이를 받아주지 않으면 떼쓰거나 우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내면아이에 관한 개념은 가족, 커플, 부부 관계 문제와 함께 연구된다.


내면아이라는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고 와닿지 않는다면 단순히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사랑하는 연인 혹은 배우자에게 당신이 존중받고 싶은 모습은 무엇인가? 부모님이 이해해줬으면 하는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분명히 내가 의식적으로 포장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싶은 부분은 아마도 내 안의 여린 모습, 쉽게 사람들에게 내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정말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났을 때야 비로소 드러낼 수 있는 바로 그 모습이다. 여기에 내면아이가 포함된다. 내면아이치료를 적용한 관계치료는 바로 그 부분에 집중한다.



내면아이를 이해하다 보면 어린 시절의 결핍과 욕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채워지지 못했고 치유되지 않은 어린 시절의 상처와 욕구가 이후의 대인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정말 중요하다.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면 각자 어린 시절의 발달단계에서 채워지지 못했던 결핍과 욕구를 배우자를 통해 채우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서로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힘 겨루기(Power struggle)’에 돌입하기도 한다. 이렇게 발달단계에서 충족되어야 할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일생 동안 이 열망을 갖고 다니는 것이다.



모든 욕구가 향하는 그곳


이처럼 발달과정에서 욕구를 해결하는 일은 감정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에 따라 관계문제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 성인이 되어서도 욕구를 충족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다. 갓난아기일 때는 그 과제를 부모가 해주었다면 이제는 스스로 풀어가야 한다. 심리학자 매슬로(Abraham H. Maslow)는 욕구에도 우선순위가 있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이 ‘매슬로의 욕구위계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은 만족하지 못한 욕구를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욕구단계는 생리적 욕구에서 시작해서 자아의 최대치를 발현하려고 하는 자아실현 욕구까지 총 5단계로 이루어진다. 각각이 별개의 욕구처럼 보이지만 아랫단계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든 단계가 위계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욕구를 관통하는 것이 바로 안정의 욕구다. 다섯 가지가 결국 몸과 마음의 안정을 갖기 위해 충족해야 할 것들이다.



태아라면 엄마 배 속에서 엄마의 심장소리를 느끼면서 가만히 있으면 그만이다. 탯줄로 세상과 연결된 태아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우리는 가끔 그러한 상태를 바라곤 한다.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게 해결되는 그런 환경 말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엄마의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고 평생 ‘생존’이라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그래서 욕구위계이론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채움으로써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있다. 결국 불안감은 생존에 없어서는 안 될 감정이다. 불안이 우리 존재의 본질적 감정이라면 안정은 그런 우리가 지속적으로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그 안에서 평안을 찾고자 안정을 향해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서점에 들른 그녀처럼, 저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 방법은 맛있는 음식일 수도, 친구와의 수다일 수도, 휴대폰게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또 다른 선택지가 생겼다. 내면아이를 보살피는 것이다. 마음에 두려움이 느껴지는 날에는 자신 안에 웅크리고 있는 내면아이를 만나보는 건 어떨까. 이따금씩 당신을 두드리던 불안감이 어쩌면 내면아이의 손짓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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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1-26 10: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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