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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김혜령 ]


어른이 되면서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다루는 일이다. 어렸을 때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성숙해야만 하는 시기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상황에 맞게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그런 것들이 쉬운 일은 아니라서 어떤 때는 에너지가 바닥나버리기도 하고 상처받는 일도 더러 있다. 손해를 보는 일도 생긴다. 관계 안에서의 불편이나 어려움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불안감이나 걱정거리, 그리고 사람 때문에 지쳐버린 마음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



책이 주는 위로


만약 내 주위에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친구가 있다면 나는 서투른 조언 대신 책을 한 권 추천해줄 것이다. 내가 백 번 위로해주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될지 모르니, 딱 한 권만  읽어보라고 하겠다. 그에게 꼭 맞는 책을 내가 알고 있다면 직접 손에 쥐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슬픔과 불안을 토닥여주는 사람이 책 속에 있다. 그래서 사람은 책장이 펼쳐진 한 권의 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로해줄 존재가 언제나 가까이 있는 셈이다. 모든 책이 자신에게 꼭 맞는 지혜를 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경험을 빌리거나 허구 뒤에 숨겨져 있는 진리에 기대어볼 수는 있다. 그중에서도 고전은 이미 많은 사람의 정신을 돌보아왔다.



고전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식상할 정도로 많이 강조되었다. 고전이 위대한 이유는 시간을 버티어왔다는 점이다. 사람도 기껏해야 백 년을 살아남기가 힘든데, 어떤 고전은 그 백 년을 몇 번이나 돌고 돌았다. 인터넷뉴스에는 매일같이 자극적인 소식들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자극적인 이야기들은 빛보다 빠르게 퍼지고 많은 이의 안줏거리가 되지만 유효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랑도 유효기간이 짧아져버린 요즘 시대에, 우리의 불안한 정신에는 시간을 버티어내는 힘이 필요하다. 시간을 견디어 살아남는 이야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의 삶에 녹여낼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런 게 고전이라면 한 번쯤 믿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고전은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어렵고 난해한 경우도 많다. 비장한 마음으로 두꺼운 고전을 빌려왔지만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린 경험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리하지 말고 서점에 가서 마음을 끄는 책 한 권을 골라보자. 에세이든 시집이든 자기계발서든 자신에게 손짓하는 책이라면 무엇이든 괜찮다. 어떤 분야의 책이라도 선입견만으로 무턱대고 밀어내지 않는 게 좋다. 작가가 한 권을 쓰는 데 들인 시간과 정성의 단 십 분의 일도 그것을 읽는 데 쏟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그 책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고 자기성찰을 하게 하는 책도 좋고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고전도 좋지만 일단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책도 좋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갖게 하는 책이라면 무엇이든 충분하다. 그 책으로 인해 어떻게든 긍정적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성공이다. 누워서 걱정만 하는 사람보다 무언가 행동하는 사람에게 불안은 자세를 낮추기 때문이다. 소소한 변화라도 그것이 돌고 돌아 인생의 색깔을 바꿔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독서를 통해 나를 다시 만나다


버지니아 울프는 사람에게는 무려 천 개나 되는 자아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자아가 단일한 상태로 있지 않고, 마음의 단절과 대립들로 잘게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내면의 어떤 갈등에 맞닥뜨릴 때, 혹은 예상치 못하게 다른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독서는 그렇게 다양한,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이다. 우리는 그 만남 속에서 대화를 하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물음표로 남아 있었던 문제의 해답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수확은 독서가 우리의 근거 없는 불안, 우리 삶 전체에 깔려 있는 불안을 위로한다는 것이다. 책 속의 또 다른 자아와의 만남, 그리고 타협을 통해서.



이는 우리네 삶이 문학작품 속 서사와 같은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원리를 이용해 실제로 책을 통해 심리치료를 하기도 한다. 문학치료 또는 독서치료(bibliotherapy)라고 불리는 이 심리치료기법은 독서의 특성을 심리치료에 적용한 것이다. 다양한 문학작품을 매개로 하여 일대일 혹은 집단으로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정서적인 고통을 완화해준다. 이 독서치료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서 영혼을 정화시켜야 한다고 보았고, 이것이 바로 카타르시스(katharsis)다. 그는 문학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마음을 정화시킴으로써 정신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바로 독서치료의 시초가 되었다. 


독서치료를 경험한 한 내담자는 처음에는 전문적인 치료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가졌지만 독서치료를 진행하는 시간 동안 자신을 밀도 있게 탐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스스로의 불안정한 감정에 대해 보통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런가 보다’라고 넘겼다면, 이제는 독서를 통해 안에 있는 문제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문제를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 큰 변화였다. 이를 통해 무수히 다른 나와 만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도 발견하게 되면서 진실한 사람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몰입의 힘


책을 읽는 행위 자체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일상의 잡념들을 잊고 몰입(flow) 상태에 이르게 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하기도 한다. 딱 한 권만큼만 집중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실제로 많은 심리학자가 이러한 몰입의 힘에 대해 연구해왔다. 특히 긍정심리학자 칙센트 미하이는 평생 ‘몰입’이라는 주제를 연구해왔는데, 몰입하는 행위가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실험 가운데 하나는 ‘경험표본방법’이다. 사람들에게 삐삐를 나눠주고 삐삐가 울릴 때마다 현재 시각과 그때 하던 일, 그리고 심리상태를 수첩에 기록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으로 경험을 수집하여 사람들이 소파에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텔레비전을 볼 때보다 독서처럼 자신이 하는 일에 오롯이 집중할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몰입의 경험에 대해 ‘물 흐르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 ‘하늘을 날아가는 자유로운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독서는 서사의 힘, 또는 몰입의 힘으로 불안을 치유해줄 수 있다. 책 읽는 나와 책이 분리되지 않고 내가 곧 책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몰아지경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불안을 완화할 수 있다. 빠르게 많은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간혹 책을 잘 읽는다는 말을 책을 ‘많이’ 읽는다는 뜻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주위 사람들은 내가 많은 책을 읽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나는 그리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다. 빨리 읽어내는 능력도 없다. 다만 한 권의 책을 오래오래 품고 있는 편이다. 반복해서 읽다 줄을 긋고, 뭔가를 끄적거리고, 온종일 고민하고, 버스 창밖을 보면서도 읽었던 책을 생각한다. 그뿐일까. 다 읽은 책을 친구에게 추천하며 또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를 감동시킨 책의 문구를 포스트잇에 써보기도 한다. 그러는 중에 책이 삶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무언가가 삶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나의 슬픔과 기쁨, 불안과 허무에까지 스며들어 영향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다가 다시 사무실에 억지로 돌아와야 할 때는 ‘하아… 사는 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하필 또 실수를 하고, 직장상사한테 ‘깨지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아직 월급날은 너무 먼 것만 같다. 그런 날 퇴근길에 서점을 들른다. ‘사는 게 뭐지?’ ‘삶이란 뭐지?’라는, 내 마음속의 어쩔 수 없는 물음표가 서점으로 나를 이끄는 것이다. 내 삶에 스며들어올 또 다른 책을 구하기 위해.



책을 너무 사랑한 남자


나만큼이나 독서를 사랑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독서가이자 소설가이자 시인이면서 도서관에서 일을 했고, 노년에 눈이 멀었지만 글을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끝까지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낙원이 있다면 아마 도서관의 형태일 것이라고 말하곤 했고, 세계를 단 한 권의 책에 담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작가 호르헤 보르헤스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읽은 모든 작가가 바로 나이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내가 사랑한 모든 여인이 바로 나다. 또 나는 내가 갔던 모든 도시이기도 하며 내 모든 조상이기도 하다.”



그는 유전적인 문제로 말년에 시각을 잃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잃었지만 다른 세상을 찾고자 했고 그것이 책이었다. 그래서 실명한 뒤에 더욱 왕성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게는 창작도 독서의 연장선이었다. 보르헤스가 시력을 잃고도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불안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 새로운 세상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도 없고 오히려 더 지치기만 하는 것 같을 때 가까운 도서관부터 찾아가보는 게 어떨까. 그리고 딱 한 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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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물론 책이 모든 사람들에게 거창한 길이 되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사회에서 에너지가 바닥나고 막막해졌을 때 손을 내밀어 방향을 안내해줄 누군가가 분명히 그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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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4-01 07: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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