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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김혜령 ]


내 약점 하나를 밝히면, 남을 웃기는 데에는 영 재주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컷 남을 웃기고 나는 웃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거다. 비록 남을 웃기는 재주는 없지만 나는 웃을 일이 많다. 유머감각을 발휘해도 웃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으니, 잘 웃는 재능은 타인의 유머를 완성시켜주는 것이라고 자위해본다.


마지막으로 배꼽 빠지게 웃은 날이 언제였던가 생각해보자. 화내고 짜증내고 눈물 흘릴 일은  많아도 깔깔거리고 웃을 일은 좀체 없는 게 요즘 세상 아니던가. 그래서 센스있는 유머로 사람들을 웃게하는 사람, 또 여러 매체 속의 우스꽝스러운 요소들과 풍자와 해학의 시도들의 힘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문학과 예술에서도 이 기술이 종종 쓰이는 걸 보면, 녹록치 않은 현실을 지혜롭게 넘겨보려 하는 인간만의 작은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어두운 면에 슬퍼하고 분개하는 대신 유머러스하게 비틀거나 진지한 상황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 심각한 주제에 너무 몰입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두기를 하면서 재치와 익살을 더해내는 작업은 우리의 삶을 한결 부드럽게 흘러가도록 도와준다. 


 그 중에서도 문학작품 속에서 사용되는 유머는 그 역할이 마냥 가볍지가 않다.  농담이 무거운 공기를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 속의 유머 또한 고통스럽고 아픈 상황에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문학속의 유머



소설가 커트 보니것에게 ‘블랙유머’나 ‘풍자’는 그의 작품들을 설명하는 주요 키워드이다. 국내에는 <제5도살장>이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미국작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대생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 때 징집되어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으로 인한 아픈 경험은 그를 바꿔놓았다. 살아남은 그는 소설을 썼다. 소설 속에서 인간존재나 종교와 같은 묵직한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특유의 유머감각과 풍자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 <나라없는 사람>이라는 에세이에는 유머에 대한 그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 그가 말하길,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는 과거 전쟁 중에 독일 드레스덴 위로 폭탄이 마구 쏟아지는 와중에도 지하실에 숨어 농담으로 위안을 삼았던 일화를 전한다. 무자비한 잔인함과 피의 현장, 그 공포 속에서도 사람들을 버티게 한 건 유머였다. 그러니까 유머는 삶의 의미나 생에의 집착 또는 고귀한 사랑만큼이나 사람을 살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 커트보니것(Kurt Vonnegut, 1922~2007)

십삼만명의 목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제정신을 갖고 차분하게 살아가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겠다. 보니것은 인류최대의 학살극을 겪은 후 반전작가로서의 삶을 택하게 되었고, 주 무기는 ‘유머’와 ‘풍자’였던 셈이다. 그는 자동차 영업사원이기도, 소방수이기도, 영어교사 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부지런히 글을 썼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전쟁에서 인간의 잔인함과 추악함을 목격했던 그가 인간의 본질을 계속해서 물어야 했던 일종의 책임감은 아니었을까. 유머는 그 책임감 있는 행동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였을 것이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웃음으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유머는 아스피린처럼 아픔을 달래준다. 앞으로 백년 후에도 사람들이 계속 웃어준다면 아주 기쁠 것 같다.  


- 커트 보니것 <나라없는 사람>중에서-



작가 스티븐 킹의 글에서도 그와 비슷한 전략이 느껴진다. <미저리>나 <쇼생크탈출> 등 수많은 작품이 영화화되어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작가 스티븐 킹은 에세이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서술한 바 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줄곧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글로 재현된 그의 고달픈 유년시절은 결고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괴상망측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느라 삶이 안정되지 못했다. 일을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그를 돌보던 시터중에는 그를 구타하는 정신이상자도 있었다. 그런 일들을 글로 풀어내면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아마 유머라는 요소를 모조리 빼버렸다면 한없이 슬프고 무거웠을 스토리들일지 모른다.


‘울 수 없으니까 웃는 것’이라는 커트보니것의 표현처럼, 슬프다고 마냥  울고 있다면 앞을 제대로 볼 수도 없으니까 우리는 웃을 거리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소설가들은 그런 인간의 비애를 작품으로 재현해내는 것이다.




유머는 성숙한 방어기제



비극에 가까운 이야기들 속에서 만나는 유머에는 묘한 힘이 느껴진다. 어깨에 올려진 짐이 너무 무거워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유머가 무거운 분위기나 어두운 스토리에서 빛을 발하는 이유는 유머가 효과적인 방어기제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방어기제란 무의식적인 충동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도구이다. 무의식의 욕구가 강해지면 사람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심리적 안정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마다 다른 전략을 사용하는데 이것을 통틀어 방어기제라고 표현한다.


방어기제는 언뜻보면 용기가 부족한 전략처럼 느껴지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어떻게든 처리해보고자 하는 시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무너지지 않으려는 최선의 노력인 것이다.


무의식에 차오르는 지나친 욕망이나 분노, 불쾌한 감정이나 공격성이 유머로 순화된다. 갈등상황에서 유머를 통해 상대의 웃음을 유발하여 심리적 갈등이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위기의 상황들이 유머를 통해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래서 적재적소의 농담은 차가운 분위기를 녹일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의 윤활유가 되어주고 지독한 권태와 견디기 힘든 무게를 덜어준다.



한 인간의 정신이 자유로울수록, 가벼울수록, 넓을수록, 희극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크다. 이 사람이 교양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빨리 그는 모든 무례한 짓을 탐지한다. 그의 능력이 고매할수록, 더 많이 예술에 접근한다. 희극적인 것을 그 누구도 상상하지 않는 곳에서 발견하고 숭고함과 아름다움인 체하는 상황들을 그것에 상응한 우스꽝스러움에 내맡기기 위해서 정신의 비범한 힘과 자유가 필요하다.


-류종영 <웃음의 미학>중에서





재미빼면 무슨 소용인가



프랑스 속담에 ‘웃지 않고 보낸 날은 허탕친 날’ 이라는 말이 있단다. 하루에도 사람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사건사고가 허다하게 벌어지는 비극적인 현실에서, 저런 속담은 왠지 사치인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모두가 웃음을 원한다. 한 친구는 나를 만나기가 무섭게 조카의 영상들을 보여주며 까르르 웃는다.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앉은 어떤 학생이 휴대폰을 보며 키득키득 거리고 있다. 사람들은 겉으론 무표정을 하고 있지만, 언제나 웃고 싶어한다. 


 언젠가 들은 얘기에서, 사람들이 선행을 행하게 하려면 ‘선’이 충분히 재미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재미는 비교적 쉽게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잘하고 싶고 잘해야 하지만 재미가 없기 때문에 끝끝내 지속하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한 일 뿐만 아니라,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든 재밌게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슬픔과 웃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는 거대한 장벽이 느껴진다. 슬픔에 빠졌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가까이서 바라보게 된다. 슬픔에 빠졌을 때 오히려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상태로 빠진다. 그것이 슬픔이 갖는 부정적 내향성이다. 그런데 웃음은 잠깐 '자기'라는 존재를 불현듯 놓아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현실, 나의 책임이 무엇이고, 내 슬픔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 이 모든 것을 그 순간 잠깐 확 놓아버리는 것이다."


- 정여울 <정여울, 그림을 읽다> 중에서 / 월간중앙2015년 2월호 -



이 외향성은 필히 지나친 슬픔이나 자학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는 힘이기도 하리라. 


누군가에게는 열심히 버티면서 사는 것이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가는 전략인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유머러스하게 사는 것이 방법일 수도 있다. 안 그래도 거친 길을 더 거친 무엇으로 가려한다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써야만하는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른다. 



숨쉬는 것도 이렇게 무거운 데, 웃을 일이 없다면 우리는 그 무거움에 짓눌려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살아갈 열정이 생기지 않을 때, 삶에 무게가 짓누르는 것만 같을 때, 뭐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다 어렵게만 느껴질 때, 코미디를 가까이 해보는 건 어떨까. 한심한 나를 견딜 수가 없을 때는 스스로를 다그치기보다는 웃픈 자학개그로 슬쩍 넘어가보자. 아무 생각없이 그저 한바탕 웃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사는 거 별거 없었지.”

“그렇지 그냥 이렇게 하루를 보내면 살아지는 거였지.”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은, 묵직한 삶의 목적이 아니라 때로는 그 모든 긴장을 풀어내는 가벼움이다. 엄청난 목표를 위해 계속 힘만 주며 살다가는 금방 지쳐버릴 지도 모른다. 장기전에서는 열심히 뜨겁게 사는 힘만큼이나 나를 이완시키고, 내게서 살짝 멀어질 수 있는 기술도 필요하다. 


 그 자체로 희극이자 비극이기도 하는 삶, 이 어지럽고 험난한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눈물이 날 정도로 통쾌한 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고귀하고 존엄한 삶도 사랑도 재미가 없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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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4-25 07:5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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