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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김혜령 ]


어릴 때는 세계지도를 보면서, ‘모든 나라를 다녀본다는 게 가능할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렵지 않게 그것이 실현가능한 일임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쯤이었다. 신문을 통해서 '일주일만에 유럽 5개국 정복' 과 같은 패키지 여행 광고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런 식이면 시간과 돈만 있으면 세계일주 거뜬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시간과 돈을 만들어 내기가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여행은 땅따먹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부루마블'게임처럼 가본 나라와 도시가 많을수록 내 만족감이 높아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잠 많고 체력도 부실한 나같은 여행객에게는 긴 후유증만 남을지도 모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서서 ‘역시 집이 최고야’하는 소감으로 여행후기를 대신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흥미로운 경험들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많은 일은 잊힌다.




탈출의 기쁨



그럼에도 현대인은 여행을 꿈꾼다. 날씨 좋은 주말이면 교외로 향하고, 바다를 찾아 맛집을 찾아 짧든 길든 외출에 나선다. 아무리 지독한 게으름이 나를 이불속에 가두어도, 텔레비전 속에서 아름다운 여행지를 볼 때면 괜스레 마음이 설레며 먼 곳으로의 여행을 품게 된다. 이처럼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갈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탈의 맛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도시근교로, 또 국내가 아닌 해외로, 가까운 아시아가 아닌 지구 반대편으로 최대한 멀리 가는 해외여행에의 막연한 동경은 일종의 도피성에 가깝다. 일상으로부터 먼, 내가 처해 있는 이 환경과 동떨어진, 더 낯선 곳으로 가고 싶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생김새도 너무나 다른 사람들 그 낯섬으로부터 작은 위안을 얻으려는 것. 이국적이고 새로운 것들을 만남으로써 탈출의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은 아닐까.


메릴랜드 대학의 심리학자 이소 아홀라(Iso-Ahola)는  '접근-회피 동기’ 개념으로 여행하는 인간을 해석한다. 우리가 무언가 행동할 때 그 마음에는 어떤 것을 얻으려고 하는 ’접근‘ 의도도 있지만, 무언가를 피하려고 하는 ’회피‘ 동기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뭔가를 성취하려는 행동이 부나 명예를 얻으려는 동기도 있지만,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 하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동기가 포함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여행이 단지 새로운 도시를 만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무언가를 피하고, 어떤 것으로부터 떠나는 탈출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요즘의 현대인에게 여행은 이 탈출의 의미가 짙어졌다. 그래서 일상이 너무 권태롭거나, 혹은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보상을 주려는 듯이 여행지를 검색하곤 한다.




일상과의 거리두기



한 편, 떠나는 것이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서 시작된 여행일 때 그 기쁨이 충만해진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 삶의 기가막힌 터닝포인트를 만들겠다든가 영화같은 사랑을 만나겠다든가, 유명여행지에서 인생샷을 찍어오겠다는 등의 목표나 목적을 가지고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막연함을 안고 무작정 떠나는 맛은 더욱 홀가분하다. 꼭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가는 긴 여행이 아니어도 좋다. 당일치기 혹은 반나절 여행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어떤 쪽이든 생활반경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러면서 반복적으로 생활하는 일상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 기회로 말미암아 내가 매일매일 먹고 자는 패턴, 직장에 가서 하는 일, 또는 공부나 육아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야말로 ‘나는 누구지?’ ‘내가 뭐하고 있었지?’라는 질문들을 새삼스레 던져보게 되는 것이다. 나와 내가 하는 활동 사이에 간격을 만든다. 나는 나로, 일은 일로, 타인은 타인으로, 살림은 살림으로만 바라본다.


일탈의 기쁨은 그렇게 단지 나와 일상 사이에 그러한 간격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완성된다. 그저 내가 반복적으로 갇혀 있었던 것에서 한발짝 떨어져나와 숨을 돌릴 수 있는 것뿐인데도 말이다. 의무와 책임에 익숙해져 내가 나인지 일인지도 모르는 시간들 속에서 조금 멀어져본다. 떠날 때의 나와 돌아올 때의 나가 같지 않을 때, 비록 시작은 도피로서의 여행이었을지라도 돌아올 때는 마음이 채워져 있을지도 모른다.



뜻밖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시간들



‘여행’을 떠올리면 내게 익숙한 모습이 있다. 어렸을 때 작은 자동차를 타고 가족들과 여행을 할 때면 목적지 즈음에서 아버지가 늘 차에서 내려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구멍가게나 약국에 들어가거나 혹은 길가던 주민에게 길을 묻고 뛰어 돌아오던 모습이 선명하다.


그 때만 해도 네비게이션도 스마트폰도 없었기 때문에 지도 한 장과 목적지의 주소가 전부였다. 몇 번이고 길을 잘못 들어 돌아 나오고, 돌아 나온만큼 몇 번이고 사람들에게 물었던 풍경. 그 풍경은 내게 친숙해져서, 성인이 되어 내가 주도적인 ‘여행자’가 되었을 때에 길을 찾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익숙한 놀이가 될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여행을 하면서도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한 번도 이용해보지 않은 것은, 그 헤매는 재미와 길을 묻는다는 핑계로 사람들의 얼굴을 잠시나마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어서였다. 지금도 여전히 목적지를 찾지 못해서 생기는 에피소드와, 혹은 기차 시간을 잘 못 기억해서 놓쳐버리는 바람에 계획을 다시 짜야하는 일 등은 소소한 재미거리이다. 틀어진 계획 때문에 시간을 보내느라 들렀던 동네 음식점에서의 기억은 유명명소를 갔던 기억보다 더 특별하게 기억된다. 그런 것들이 여행의 묘미였다. 똑같은 여행지를 가더라도 나만 가져오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의 길찾기 기능과 맛집까지 알려주는 기능이 있어 왠만해선 헤맬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런 것들이 아주 좋은 여행길잡이가 되어주지만 그 덕에 ‘예상치 못한, 의도치 않은, 계획에 없던’ 에피소드들이 줄어든 것 같아 내심 아쉽다.



좀처럼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여행을 가면 자신의 색다른 모습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된다. 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일수록 생활반경이 좁고, 그 안에서 경험하는 것들이 극도로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을 마주할 일도, 그만큼의 낯선 나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생활반경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든 낯선 나를 경험하게 한다.


평소에 겪어보지 않은 광경을 접하거나, 새로운 상황에 맞닥들여보면서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필연적으로 조금씩 성장해있게 된다. 짧은 여행만으로도 스스로의 작은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애초에 우리의 목적이 크게 성숙해지는 것이나, 다양한 문화를 접해 지식을 늘리는 것에 있지 않고 즐겁고 싶고 또 일상에 지친 자신을 회복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감과 같은 긍정적인 정서는 목표를 쟁취했을 때보다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여행이야말로 산 정상에 올라서야만 완성되는 목표의 행위가 아니라,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모든 일들이 흥미롭고 설레는 과정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여행준비기간과 출발의 순간, 그리고 길을 걷고 또다시 돌아오는 여정 중 어떤 것도 여행의 재미에서 빼놓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평소 출퇴근 길에서는 도중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저 배경일뿐이지만, 여행의 장소에서는 작은 꽃과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괜히 새롭고 특별하게 보이지 않던가. 그렇기에 여행은 모든 시간과 경험을 설렘과 즐거움으로 꽉 채울 수 있는 몇 안되는 활동인 듯 하다.



일상은 여행의 무한반복이 아닐까



가끔은 의문이 든다. 과연 어디부터 여행이라고 봐야 할까. 길을 떠나는 순간? 기차나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일까. 아니면 짐을 쌀 때부터일까. 혹은 그보다 더 전에 일상의 스트레스 때문에 즉흥적으로 여행을 계획하게 된 날부터라고 봐야할까. 어쩌면 훨씬 더 전에 티비에서 그리스의 아름다운 지중해를 보며, 언젠가 꼭 그리스에 가고 말거야 라고 마음먹은 때부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본다면 여행의 끝 또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당도한 순간은 아닐 것이다. 일상에 돌아와 여행을 곱씹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을 선물하는 시간. 그러면서 여행 중에 있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을 늘어놓는 시간. 다시 일상의 쳇바퀴를 돌리면서 문득문득 그 시간들을 기억하며 사진을 꺼내보는 시간까지 포함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 전체가 여행의 무한반복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해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반복되는 한주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지는 느낌이다. 일탈의 맛도 다양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창조의 재미도 바로 여기에 있을 거라 위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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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5-24 08: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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