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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변한석 ]



최근 필자가 듣는 한 수업에서 담당 교수님이 미국 현지에 있을 때 9.11테러를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비록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날 아침의 기억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고 했다. 교수님의 같은 연구실 미국인 조교가 출근하면서 “비행기가 빌딩을 뚫었다!”라고 얘기하자 교수님은 ‘내가 영어 스피킹이 아직도 부족한가?’라고 생각할 뿐 조교의 말을 믿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비행기가 두 번째로 빌딩과 충돌하는 장면을 TV 생방송으로 지켜본 후에야 교수님은 자신의 영어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진짜 테러가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렸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필자 역시 9.11테러 당일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5살도 안 된 ‘꼬꼬마’였지만, 아침마다 보던 ‘텔레토비’ 애니메이션이 방영을 안 하고, 뉴스 속보로 까만 연기가 자욱한 빌딩만 내내 보여줬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비록 그때 나는 테러가 뭔지 알지도 못했고 그저 매일 보던 만화가 방영되지 않아 속상해서 기억에 남았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크고 나서야 내가 시청한 게 911테러의 현장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또 얼마 전에는 세월호 참사의 7주기가 있었다. 세월호 사건은 근래 한국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참사 중 하나로 손꼽힌다. 세월호를 주제로 사람들이 얘기를 나눌 때 왕왕 자신이 세월호 참사 소식을 들었던 당시 뭘 했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몇 주 전의 어떤 요일에 먹은 점심 메뉴가 뭔지도 까먹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당일 뉴스를 보면서 자신이 먹은 점심 메뉴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몇 년이 지났지만 그날 자신의 일정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렇듯 사람마다 기억되는 장면들은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소식을 들었던 때의 기억을 또렷하고 자세하게 떠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에선 이렇게 충격적이거나 중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의 순간을 마치 스냅샷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걸 ‘섬광기억’이라고 한다. 앞서 소개한 911테러나 세월호 참사의 사례가 대표적이며, 유명인의 사망 소식을 듣거나 혹은 사회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인생에서 겪었던 충격과 공포의 순간도 섬광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이런 섬광기억의 개념에 따르면 내가 911테러 뉴스를 본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 건 좋아하던 TV 프로그램이 방영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테러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그런 것이다.

 

섬광기억의 두 가지 특징은 몇십 년이 지나도 기억이 망각되지 않고 오히려 매우 뚜렷하게 남아있으며, 섬광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섬광기억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이 사고나 사회적 이슈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사건을 직접 겪은 당사자에게 있는 ‘섬광기억’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도 작동될 수 있는 심각한 기억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이런 트라우마를 치료할 수 있는 도구로서 섬광기억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섬광기억이 정말 정확할까? 이 질문에 우리는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비록 당시의 장면이나 느낌이 방금 겪은 것처럼 생생할지는 몰라도, 정확한 기억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 사람들의 섬광기억을 여러 시기에 걸쳐 회상하게 하는 종단연구를 진행했는데, 회상할 때마다 실험 참가자들의 서술은 계속 달라졌다. 이 말은 즉 섬광기억도 여타 장기기억들처럼 부정확한 기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911테러 당시 내가 보려고 했던 만화가 ‘텔레토비’가 아닐 수도 있다!

 

비록 섬광기억이 착각된 기억일지라도, 우리가 겪었던 사건의 심각성과 우리가 느꼈던 감정이 가짜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때의 충격적인 사건을 회상해보면서 그때 내가 보인 반응과 감정을 넘어서 사건의 본질을 살펴보고, 끔찍한 기억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예방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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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5-19 07: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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