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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주의’, ‘-주의자’란 단언적 표현을 들을 때마다 불편하다. -주의나 -주의자란 말에는 결연한 의지와 결심이 들어있다. 인생의 방향을 정할 때 때로는 의지가 가득한 결연함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마음을 굽히지 않고 확신에 차서 과연 살 수 있을까? 삶은 불확실의 연속이고, ‘우연한 선택’의 집합이다. 크고 작은 선택이 모여 마치 의지의 망토를 두른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정신 차리면 우연한 선택이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인도한다고 믿는 편이다. 이 우연에는 물론 나의 선택이 스며있지만 말이다.


‘나는 오십이 되겠어, 팔십까지만 살 거야’라고 아무도 결심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오십이 되고, 팔십이 된다. 어린아이 때야 어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하고 터무니없는 꿈을 꾸지만, 성인이 되어 일부러 나이를 먹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비혼으로 사는 것도 나이 먹는 것과 비슷하다. 돌이켜 보면 ‘결혼은 절대 안 하겠어. 비혼주의자로 살 거야.’ 하는 굳게 결심한 적은 없다. 선언 따위도 한 적 없다. 이성을 만나고 사귀며 헤어지기 싫어서 앞뒤 안 재는 격한 감정에 빠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결혼 후 생활에 대해 또래들보다 비교적 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는 내 진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는 마음이 시킨 선택이었다.


취업을 보류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던 터라 꾸역꾸역 졸업한 후에는 학교 밖 세상이 재밌기만 했다. 책만 읽다가 진짜 사람이 사는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었다.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재미있었다. 심지어 술 왕창 마시는 회식도 재미있었고, 부모님께 용돈을 받다가 월급 받아서 내 마음대로 쓰는 것도 재밌었다. 이 재미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수많은 재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놀았고, 공부했고, 여행 다니는 등 딴짓에 몰입했다.


연애도 했지만, 감정 소모가 많아서 내적 갈등이 절정에 달하곤 했다. 우리 부모님 말고 나를 항상 지지해주고,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을 만난 행운이 없진 않았지만, ‘Timing is everything’이란 말이 있다. 때가 아닐 때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만나서 행운인 줄 몰랐다. 살면서 내 편을 만나는 일이 몹시 어려운 일인 줄, 그때는 몰랐다. 때가 아닐 때 만난 인연은 그저 스치는 인연일 뿐이다. 스친 인연을 가끔 떠올리기는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지’ 기억하는 정도로 덤덤하다.      



프랑스 소설가 에밀 아자르가 쓴 《자기 앞의 생》에서 주인공 어린 모모가 이웃집 할아버지에게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하고 묻는다. 할아버지의 대답은 “그렇단다.”였다. 사람은 정말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 답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로자 아줌마는 젊었을 때 성매매로 생계를 꾸렸지만, 이제 늙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여인들의 아이들을 돌보는 베이비시터이다. 주인공 꼬마 모모도 돈을 받고 키우게 되었지만, 언젠가부터 모모 엄마에게서 양육비가 오지도 않고 연락도 끊겼다. 로자 아줌마는 고아나 다름없는 모모를 돌본다. 상냥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모를 내치지도 않는다. 모모와 로자의 관계는 어른이 아이에게 갖는 마땅한 책임과 의무 관계가 아니라 시선을 끈다. 두 사람은 사회적 소수자로서 아웅다웅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서로 의지하는 관계이다.


로자 아줌마의 총기가 점점 사라지고 전쟁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정신줄을 놓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다. 그러자 로자 아줌마를 돌보는 책임을 어린 모모가 맡게 된다. 로자 아줌마가 다른 세상에서 헤매며 고통받는 모습을 모모는 곁에서 지켜본다. 로자 아줌마가 죽음에 한 발씩 다가가자 모모는 세상에 혼자 남겨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고, 로자 아줌마 역시 모모가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봐 두려워한다. 버려질 두려움을 아는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는 존재가 된다.


로자 아줌마도 모모도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주고받은 적이 없지만, 두 사람은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의 삶을 걱정하고 돌보며 끝까지 책임지는 일은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으니까.  사랑은 장밋빛 도는 이벤트가 아니라 서로 아웅다웅해도 필요할 때 곁을 지키는 일이라고 절절하게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좁은 의미로 사용해서 사랑의 부재를 푸념하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면 가장 먼저 이성 간의 달달함을 떠올리고, 화목한 가정을 떠올린다. 달달함, 화목, 설렘 등은 순간의 감정으로 지속되기 힘들다. 세로토닌을 만드는 찰나의 감정 사이에 스트레스 호르몬이 지속되는 관계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닐까.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관계가 보여준 것처럼 책임과 지속성이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


지속할 수 있는 사랑은 넓은 의미로 보면 어디에나 있다. 사람이 가슴에 사랑 한 줌도 품지 않는다면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질 것이다. 하지만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관계에서 보듯이 사랑은 명쾌한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고 시작과 끝도 불분명하다. 사람마다 가슴에 품은 사랑의 종류도 다르다.


내향인은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으니 혼자 보내는 시간을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들이나 산에 핀 야생화를 보며 위안을 얻는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래 묵은 옛날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이미 세상에 없는 작가의 글이나 그림에 감정이입을 하고, 눈물 쏟으며 위안을 얻기도 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에게서 위안을 얻기도 하지만, 사람이 아닌 것에서도 뜻밖의 위안을 얻는다. 울적할 때 말 안 통하는 사람에게 감정을 설명하느라 진을 빼느니 차라리 집 앞 산책로에 나가 나무 향기를 맡으면서 걷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사고 프레임을 조금만 바꾸면 사랑은 내가 발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스펙트럼도 넓어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입맛에 맞는 아이스크림 고르듯이 사랑을 고를 수 있다. 사랑을 이성 간에 호르몬 결합으로 한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다양한 사랑에 눈 뜰 수 있다.


혼자 산다면 여러 가지 맛의 사랑을 탐구해서 자신에게 알맞은 사랑을 곁에 두는데 적극적이어야 한다. 다양한 맛의 사랑을 챙길 줄 알면 심심할 틈이 없고, '지금 이대로'를 즐길 수 있다. 이는 비혼만이 아니라 곁에 반려인을 둔 사람에게도 필요한 삶의 기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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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7-07 23: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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