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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 올라있는 한국 노래(특히 애절한 발라드 류) 댓글에는 '나라 잃은 창법'이니 '한국인의 한이 느껴지는 목소리'니 하는 반응들이 많습니다. 한이란 무엇일까요? 나라를 잃은 느낌? 애절하고 슬픈 기분? 한(恨)은 정과 더불어 한국인의 대표적인 정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요. 정작 한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 듯합니다.

문화적 개념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알고 있고 익숙하지만 그것을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내가 보기엔 이게 아닌가 싶지만 다른 누구는 또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문화란 코끼리와 같아서 저마다 바라보고 이해하는 측면이 다를 수밖에 없죠(참조: 문화는 코끼리다https://brunch.co.kr/@onestepculture/369).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문화심리학자가 하는 일이 문화적 현상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겁니다. 이번 글에서는 참으로 복잡하고 다층적인 한국인의 한(恨)이라는 개념에 대해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한국문화에서 한국인으로 살면서 한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는 지점이 모두 다르시겠지만 그래도 제 설명을 한번 따라와 보셨으면 합니다.


한은 한국적 정서인가?


한국문화를 묘사하면서 한과 유사한 개념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일본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일 것입니다. 그는 자연과 역사가 예술의 특성을 결정한다는 생각 아래 조선의 예술은 반도라는 지리적 환경이 주는 운명적인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야나기 무네요시

'비애미'로 요약할 수 있는 그의 주장은, 조선은 반도적 성격 때문에 늘 외침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괴로움과 슬픔의 역사를 갖게 되었으며, 그러한 역사적 경험이 조선 특유의 미감을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관점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식민사관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널리 전파되었고, 6.25와 분단, 군사독재 등 슬프고 고통스러운 현대사를 겪으며 한(恨)은 한국인의 대표적 정서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어떤 지식인은 한국의 미감이 한의 정서라는 주장에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한복의 버선코나 한옥 지붕의 곡선을 보고도 ‘너무나도 슬픈 곡선’이라 찬탄해 마지않았다고 하죠.


지붕이 슬퍼?

과연 한은 한국의 슬픈 역사가 만들어낸 정서일까요? 어떤 이들은 한 자체가 제국주의 시대에 일제가 우리나라를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여러 기록들을 보면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한(恨)이 한국적인 정서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이 의미하는 것이 그렇게 어둡고 퇴영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적 개념이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을 도외시하고 한국인들의 한(恨)은 한국의 어둡고 슬픈 역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증편향일 뿐입니다.


한의 차원


우리가 한을 슬프고 괴롭고 어두운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한국에 그러한 이미지들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널리 표상되는 한의 이미지는 한의 어느 한 부분에 대한 것인데요.

문화심리학자 최상진(1991)은 한을 크게 정동(emotion)과 같은 감정수준의 한, 세련된 정서체계를 갖춘 정조(sentiment)로서의 한, 성격 특질(trait)로서의 한이라는 세 개의 차원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정동수준의 한은 사람들이 한을 인식하게 되는 경험수준의 감정입니다. 억울함, 분함, 울화 등의 정서가 그것이고요. 이러한 감정들은 일련의 심리적 과정을 거쳐 하나의 정조(대충 분위기?)가 됩니다. 정조로서의 한이란 문학이나 예술에서 표현되는 한의 이미지입니다. 절절함, 쓸쓸함, 자책감 등과 같이 경험수준의 한이 문화적으로 양식화된 감정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격수준의 한은 개인수준에서 내면화된 한입니다. 한스러운 인생을 살아온 개인의 경험이 인생무상, 체념, 현실초월 등 그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성격)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고 사용하는 한의 개념은 이 세 차원이 혼용되어 있는데요. 특히 애절한 노래를 들으며 떠올리는 한의 정서는 예술적 표현으로 가다듬어진 정조(sentiment)로서의 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나라를 잃는 등의 직접적인 좌절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한국 가수들이 노래를 한스럽게 부른다는 말은, 한국에는 슬픈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더 슬프게 느껴지는가에 대한 공유된 문화적 방식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한의 발생 원인


그렇다면 한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경험되는 것일까요? 일단 '한국의 슬픈 역사'가 전부는 아니라는 말씀 드립니다. 물론 집단의 공유된 역사는 문화적 정서 형성에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기는 합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문화 구성원들의 '경험방식'입니다.



최상진은 한의 발생상황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당한 차별을 받을 때 입니다. 예를 들면, 국가나 기관으로부터 부당한 핍박을 당하거나 또는 못 가진 사람이 잘 사는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게 피해당하거나 무시당할 때인데요. 쉽게 말해서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 한국인들은 한을 경험합니다.

둘째, 타인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결핍(relative deprivation)되었을 때 한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전자는 비교적 분명한 가해자가 존재하는 데 반해 이러한 경우는 뚜렷한 가해자가 존재하지 않는데요. 1억 버는 사람이 10억 버는 사람에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처럼 주로 다른 이들과의 비교에 의해 나타나는 '주관적인'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자기 자신의 지울 수 없는 실수에 의한 불행한 결과에 의해 발생하는 한입니다. 앞의 상황들이 통제가 불가능한 외적 요인에 의한 좌절상황이라면, 이 경우는 자기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 생전에는 불효하던 자식이 부모가 돌아가시고 후회하는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한이 발생하는 상황들의 공통점은 '어쩔 수 없음'과 '돌이킬 수 없음'입니다. 즉 한이란 통제불가능한 이유로 발생하는 부정적 결과로 인한 정서죠. 어찌보면 문화보편적일 수 있는 이 감정을 '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주관성'입니다.

한국인의 감정경험 방식은 상당히 주관적이라 이해되고 있습니다(참고: 한국인 마음의 질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66). 요약하자면, 한국인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해석할 때 객관적 사실이나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는 별개로 자기본위의 해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부당한 피해나 상대적 박탈과 같이 자신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을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또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쉽다는 것이죠. 이는 특정 시기의 역사적 경험이 원인이라기보다는 한국인들의 문화적 경험방식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경험방식은 또한 한국인의 자기관, 즉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지는데요
(참고: 한국인의 자기가치감https://brunch.co.kr/@onestepculture/292). 
짧게 말씀드리면, 자기가치감 수준이 높은 한국인들이 자신에게 닥친 부당하고 부정적인 사건들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드린 내용 중에는 꽤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한이라는 개념이 한국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큼에도 이제야 글로 옮기게 된 이유는, 이 주제를 풀어내려면 먼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관계로 이번 글을 여기서 한번 끊어 가겠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한의 문화적 의미와 심리적 기능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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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3-26 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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