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한국심리학신문=편집부 ]
퇴근길 지하철역을 걷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면 괜히 걸음이 빨라진다. 엘리베이터 안에 낯선 사람이 있으면 휴대폰을 꽉 쥐게 된다. 나만 이런 건 아닌가 싶었는데, 요즘 강남 일대 호신술 도장에는 여성 회원이 90%에 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 역삼동 연쇄 방화 사건, 묻지마 폭행,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흉기 난동. 뉴스가 쏟아질 때마다 사람들은 체육관 문을 두드린다. 단순히 운동을 배우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리학자들은 그 행동 안에 훨씬 복잡한 마음의 작동을 발견한다.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지각된 통제감(perceived control)'의 회복 행동으로 설명한다. 미국 코넬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엘렌 랭어는 1970년대부터 수십 년에 걸쳐 연구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느낄 때 불안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반대로 통제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상황, 즉 언제 어디서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는 감각은 만성적 공포 상태를 유발한다.
문제는 묻지마 범죄가 정확히 이 '통제 불가 상황'의 전형이라는 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맥락도 없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감각은 뇌의 편도체를 지속적으로 자극해 과각성 상태를 만들어낸다. 호신술 학원에 등록하는 행동은 이 과각성 상태를 스스로 완화하려는 적극적 대처인 셈이다.
실제로 2023년 국내 한 대학 심리학 연구팀이 성인 여성 8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범죄 관련 뉴스를 반복 접한 집단에서 호신 관련 도구 구매나 운동 등록 등 '능동적 안전 행동'이 평균 2.7배 높게 나타났다. 뉴스가 불안을 키우고, 불안이 행동을 촉진하는 구조다.
흥미로운 점은 객관적 범죄 발생 건수와 체감 공포 사이의 간극이다.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범죄학과 마크 워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미디어 노출 빈도가 높을수록 실제 범죄 피해 경험 여부와 무관하게 범죄 피해에 대한 공포가 비례해 상승한다. 이를 '범죄 공포(fear of crime)'라고 부르는데, 실제 위험보다 훨씬 강하고 광범위하게 작동한다.
우리 뇌는 반복적으로 접하는 정보를 '흔한 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 용어로는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이라 부른다. 뉴스에서 묻지마 범죄를 자주 보면, 실제 통계와 상관없이 그 범죄가 내 일상에서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뇌가 판단하는 것이다. 뇌는 통계보다 생생한 이미지를 더 믿는다.
이 현상은 성별로도 다르게 나타난다. 영국 에섹스대 사회학과 에스더 피아타-크라스너 교수의 2021년 연구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범죄 뉴스 노출 후 외출 자제·경로 변경·보호 도구 소지 등의 행동 변화를 보이는 비율이 약 3.4배 높았다. 사회적으로 더 취약한 위치에 있다는 인식이 공포 반응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신술 도장에 등록하는 것이 실제로 불안 완화에 도움이 될까. 심리학적으로는 '그렇다'고 본다.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다. 존 라티 미국 하버드대 의학대학원 정신의학과 임상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규칙적인 신체 운동이 뇌의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 특히 편도체의 과활성화를 조절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밝혔다. 운동은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을 낮추고 세로토닌과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한다.
특히 무도 계열 운동은 일반 운동보다 심리적 자기효능감을 높이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도 있다. 2022년 독일 쾰른스포츠대학교 연구팀이 성인 여성 220명을 대상으로 12주간 호신술 교육을 진행한 결과, 참여자의 71.3%에서 외출 불안감이 유의미하게 감소했고, 자기 보호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평균 58% 상승했다. 기술보다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감각 자체가 불안을 줄이는 것이다.
이른바 '자기효능감(self-efficacy)' 이론을 정립한 앨버트 반두라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인간이 어떤 도전에 대처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실제 행동에서도 훨씬 침착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평생의 연구로 증명했다. 도장에서 땀을 흘리는 시간이 뇌에게 '나는 무방비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 흐름에서 한 가지를 경고한다. 범죄에 대한 공포가 지나치게 커지면, 실제 위험을 줄이는 대신 일상을 스스로 제한하게 된다는 점이다. 혼자 외출하지 않기, 대중교통 기피, 특정 지역 무조건 회피처럼 삶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행동 억제(behavioral inhibition)'라고 부르며, 공포 자체보다 삶의 질을 더 크게 해친다.
건강한 대비와 불안 과잉의 경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간단한 질문 하나를 던져보면 된다. '이 행동이 내 삶을 넓혀주는가, 아니면 좁혀주는가.' 호신술을 배우거나 안전 앱을 설치하는 것은 삶을 넓히는 쪽이다. 반면 아예 외출을 포기하거나, 주변 모든 사람을 잠재적 위협으로 보게 됐다면 그 공포는 이미 나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 퇴근길에 발소리에 움찔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약한 게 아니라 뇌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불안을 무시하지도, 삶 전체를 집어삼키게 두지도 말 것. 호신술 한 클래스, 혹은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오늘의 무서운 뉴스를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뇌는 조금 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당신의 불안은 충분히 이해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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