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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스테르담 ]



바야흐로 '용기'가 필요한 시대다.


그런데 그 '용기'의 의미는 이전과 다르다. 지금까지 '용기'란 무언가를 쟁취하고, 성취하고, 이루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필요한 '용기'는 포기할 줄 알고, 느리게 갈 줄 알며, 쥐고 있는 것을 놓아주는 것으로 더 와 닿는다. 어쩌면 그것이 더 큰 용기 일지 모른다.


할 수 있다고 용기 내어 말하는 것, 할 수 없다고 용기 내어 말하는 것.


후자가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임을 우리는 안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그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 굳센 결심일 수 있지만, 후자의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 대한 두려움도 감내한 용기다.


성장의 시대엔 불가능한 것도 가능했었다.


안되면 되게 할 수 있었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저, 시대를 탓하자는 게 아니다. 안 되는 것도 많고, 즐길 수 없으면 피해야 하는 것도 있다. 세상은 이미 많은 것들이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렁물렁하게 변화가 일어날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 하던 시대가 아니다. 이젠 개천도 없고, 용도 없다. 기성세대는 상대적인 의미지만, 어느 때부턴가 그 세대를 분명하게 나누는 무언가가 우리 주위를 엄습하고 있다.


그렇게, '용기'는 하나의 목소리가 되었다.


아니라고 생각되면 '퇴사'를 하고, 즐겁지 않다고 느껴지면 '자퇴'를 하기도 한다. 기존에 정해진 공식을 타파하는 것이다. 정해진 코스와 단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높이 산다.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그 목소리가 하나 둘 많아지면서, 나는 정말 시대가 변했음을 새삼 깨닫는다.


'용기'는 용감한 자의 것이 아니다.


용감하지 않은 자가, 자신과는 맞지 않는 시대와 힘겨이 싸워내기 위해 발악하며 발산하는 것이 '용기'라면 더 그렇다. 우리가 흔히들 '용기'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용감한 게 아니다. 또는, 내가 어떤 '용기'를 내어서 과감하게 무언가를 맞닥뜨렸을 때, 나 자신은 용감한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사과를 99개 가진 사람이 1개를 더 쟁취하기 위해 부린 '용기'와, 100개를 채우지 않고 그것이 98개로 줄어드는 것을 용인할 수 있는 '용기' 중 어떤 것이 더 큰 '용기'일까? 후자의 '용기'가 더 크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솔직히, 그 상황이 되면 나는 어떤 '용기'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확신이 없다.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 가지고 있는 자들을 힐난하지만, 가지지 않은 자가 가지게 되면 가지고 있는 자들보다 더 무섭게 돌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때론, 가진 자들이 가지지 않은 자들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그렇게, 덜 큰 '용기'를 택하곤 한다.


'용기'에 대해 무슨 말을 쓰고 싶어서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흘러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쓰기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무어라도 토해내야겠다는 본능에 이끌렸다. 누군가 이 글을 보고, '뭘 말하고 싶은 거야?'란 비판을 감내할 수 있는 '용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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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8-10 16: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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