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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유시연 ]


<23 아이덴티티(Split)>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아는가? 2017년 개봉한 제임스 맥어보이 배우 주연의 영화로, 23개의 인격을 가진 남성 ‘케빈’이 24번째 인격의 지시로 3명의 10대 소녀를 납치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던 ‘빌리 밀리건’이라는 실존 인물로부터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빌리 밀리건'은 누구인가?


1977년, 미국 오하이오 대학가에서 성폭행 용의자로 한 남자가 체포된다. 그의 이름은 빌리 밀리건. 그는 수 차례의 강간, 무장강도, 폭행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수사/심문 과정에서 24명의 인격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최초로 무죄를 선고받으며, 이후 ‘해리성 정체가 장애’, 일명 다중인격이라는 병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인격 장애가 더욱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각 인격들의 나이, 성별, 체격, 성격부터 국적, 출신지, 모국어까지 모든 것이 달라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병 자체가 기존 주 인격의 인적사항에 구애받지 않고 무한한 범위로 인격을 늘릴 수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빌리 밀리건의 주된 인격은 침착하게 상황을 주도하는 ‘아서’와 쉽게 분노하는 ‘레이건’으로, 두 인격의 주도하에 빌리 밀리건의 범죄가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빌리 밀리건은 재판으로 유명세를 얻은 후, 정신병원에서 그렸던 그림을 판매하거나 전시회를 열며 막대한 수입을 얻었다. 정신 병원에서도 상당히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나 끊임없이 범죄를 치며 사고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후에도 라스베가스에서 도박, 마약을 즐기다 생을 마감한다. 그의 이야기는 이후 대니얼 키스의 논픽션 소설 <빌리 밀리건>, 넷플릭스 다큐 <빌리 밀리건, 24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 등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되었다.



빌리 밀리건을 무죄로 만든, ‘해리성 정체감 장애’란?


많은 사람들이 ‘해리성 인격 장애’, ‘해리성 정체 장애’, ‘다중인격’ 등으로 알고 있는 이 병명의 공식적인 의학 용어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이다. 이는 해리성 장애(Dissociative Disorder)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통계청에서 제공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에 따르면, ‘해리 장애’란 과거 기억, 자아 각성, 즉각적 감정 등과 몸의 움직임의 부분적 또는 완전한 통합 상실을 뜻한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외에도 ‘해리성 기억 상실’, ‘해리성 둔주’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병의 경우에도, 특정 인격이 그 사람의 마음을 장악할 동안 경험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며, 인격의 존재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주요 증상 중 하나인 ‘해리(의식과 동떨어진 상태에서 그것을 경험하는 마음의 상태)’는 환경적 위협을 외상으로 받아들인 유아가 생존을 위협하는 불안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택한 방어 증상이다. 이처럼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원인으로는 어릴 적 경험한 신체적·성적 학대 등이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자의 뇌 활동 역시 일반인과 다른 점을 보인다. 뇌 영상을 촬영해보면, 한쪽 자아의 행동이 사라지고 다른 쪽이 등장할 때, 뇌의 뉴런 패턴 또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전환되는 시점에서 뇌의 기억을 처리하는 부분이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멈추고 뉴런의 움직임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뇌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역시 함께 달라지는 것이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치료될 수 있는 것인가?


해리성 정체감 장애 치료의 최종 목표는, 분리된 인격들이 한 사람의 인격으로 다시 합쳐져 환자의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치료자가 환자에게 신뢰를 주고, 모든 인격이 자유롭게 발현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어야 한다. 또한 해리성 정체감 장애의 주 원인은 어린 시절의 학대 경험이기 때문에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치료 공간 내에서 치료자의 도움을 받아 다시 그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고, 공포에 직면하는 연습을 시작함으로써 환자가 자신의 아픔과 장애에 대해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모든 인격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쉽지는 않기 때문에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서는 최면 치료가 가장 많이 이용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한다.



모든 해리성 정체감 장애자는 무죄로 판결받는 것인가?


해리성 정체감 장애는 스스로 질환 자체를 거부하고, 다른 인격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많아 제대로 진단을 받기까지 평균 7년이라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빌리 밀리건 역시 여러 건의 성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피의자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빌리 밀리건’ 사건처럼,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는 모든 범죄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심신상실 또는 심신 미약으로 인정되는 다른 정신적 질병과는 다르게,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더욱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이유는, 책임 능력의 주체를 인격별로 따로 판단해야 할지, 행위자 한 명으로 판단해야 할지 그 기준이 명확하게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리 밀리건이 무죄 판결을 받았던 미국의 경우, 주마다 형사 책임의 판단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미국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에서도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정신장애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이상이 감형의 근거가 될 수 있음은 모두 동일하다. 따라서 주인격 접근, 대체인격 접근, 통합적 접근 방법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 따라 형사책임 귀속에 대한 판단이 이뤄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형법 제10조 제2항에서 한정책임능력(심신장애 상태이긴 하지만 사물변별능력이나 의사결정능력이 미약한, 심신미약의 상태)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정신질환이 책임 능력자, 책임무능력과 능력 사이 중간 형태, 부분적 책임무능력자 중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따라서 사건의 유무죄 판결에 있어서도 무엇을 근거로 책임능력을 판단하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 기준이 밝혀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다양한 상황에 마주하다 보면, ‘이럴 땐 내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그리고 그 모든 모습이 나의 인격으로 나타나는 상황이 실제가 된다면, 매우 무서운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내가 모르는 나의 시간 동안, 또 다른 내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에 대한 아무런 예측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빌리 밀리건 역시, 어릴 적 학대의 경험과 그로 인한 분노가 내면에 23명의 어벤져스를 만들었던 건 아닐까? 그 영웅들이 오히려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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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 김희정.(2015)."해리성정체장애(Dissociative Indendity Disorder)의 형사책임에 관한 소고.법학연구",18(2),1-27. - 윤한주.(2017)."다중 인격의 뇌를 파헤치다 23 아이덴티티.브레인",63(),62-63. - 한송이."해리성 정체성장애에 대한 정신분석적 고찰". 국내석사학위논문 한신대학교 정신분석대학원, 2018.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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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0-06 18:47:27
  • 수정 2022-10-06 18: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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