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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조은교 ]


나의 MBTI 유형 중 마지막 알파벳은 J이다. J, 판단형, 원하는 목표 및 목적 달성을 위해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유형. 수도 없이 MBTI 검사를 해왔지만 다른 알파벳에는 변화가 있어도 J라는 알파벳은 항상 결과창에서 보였다. 


MBTI가 큰 유행을 끌지 않았을 때도, 어쩌면 십 년 전에 이 검사를 했다고 해도 똑같은 결과였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던 편이기 때문이다. 가족여행이나 명절 때 조부모님댁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챙겨야 할 것들을 목록으로 쭉 적어두는 것은 기본이며, 부모님이 장을 보러 갈 때에도 인간 메모장의 역할을 톡톡히 했고, 초등학생 때부터 플래너나 투두리스트를 적는 일을 즐겼다. 나와 나이 차가 꽤 나는 동생이 나의 반만 따라가도 소원이 없겠다는 부모님의 칭찬은 어린 꼬마였던 나에게 부스터로 작용했다. 그렇게 계획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습관화한 삶은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다만, 중학생 시절에 ‘계획적인 삶의 또 다른 단면'을 느꼈던 적이 있다. 한창 사람들 사이에서 카카오스토리보다 인스타그램이 인기를 쌓아 올라가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아무 생각 없이 나도 친구들을 따라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핸드폰을 들여다봤던 기억이 난다. 그 때, 고작 열네살이었던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공스타그램’. 자신이 공부한 내용이 담겨있는 플래너와 타임랩스 등을 업로드하는 유형의 계정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유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런 류의 계정이 차고 넘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계획 세우기 및 정리하기’에 도가 텄던 어린 나에게는 또 하나의 자극이었고 우물 안의 나를 뽐낼 수 있는 기회였다. 덩달아 공스타그램 계정을 만든 것은 순식간이었고,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시에 나의 최고 장점이었던 계획 수립은 그 때부터 살짝 변질되었다. 


어떻게 변질되었냐고 하면 – 계획을 최대한 많고 다양하고 세부적이게 세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실질적인 계획보다는 눈에 보이는 계획의 양을 중요시한 것의 결과였다. 어렸을 때부터 대학생이 된 지금에도 레포트를 쓸 때 한 줄이면 다 설명될 내용을 다섯 줄에 거쳐 길게 늘어트리곤 하는데, 마치 그런 것처럼 플래너에 한 개 항목으로 될 일을 다섯 개로 늘려서 적어두는 것이 익숙해져버렸다. 아무래도 공스타그램 운영자가 된 입장으로, 다른 공스타그램 운영자들은 나보다 더 어려운 공부를 더 많이 해내는 것 같아보여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게 되었다. 그렇게 거짓 계획을 세우고 지켜내는 루틴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나는 나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기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멋있는 공부를 하고 있었다. 거짓된 계획이 그 어떤 계획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열여섯 막바지의 나는 하루아침에 공부 계정을 없앴고, 짧고 굵은 계획들을 통해 양질의 공부에 좀 더 가까운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변화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생겼다. 지독한 계획러였던 나였고, 그렇게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다보니 계획을 많이 완수해내지 못했을 때 생기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환경에 갑작스러운 변수가 생겨 계획을 못 지킨 것보다도, 그냥 내가 계획을 다 완수할 수 있을 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에 생기는 자책감은 누적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 계획 없이 하루를 살아가보자! 하는 생각으로 무작정 집을 나섰다. 전 날 오늘 뭘 입을지, 어딜 가서 뭘 할 지 정해두지 않는 날은 정말 거의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날 하루가 나의 인생 태도를 살짝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무조건적으로 지킬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다 지켜야만 좋은 하루, 완벽한 하루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 뒤로, 나 스스로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지치지 않게, 계획이라는 철창으로부터 벗어나 조금은 유연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일명 ‘무계획으로부터 오는 미학’을 경험했다고 할까? 고 보니, 여백의 미라는 말은 계획의 측면에 있어서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날 뒤로 이전에 비해 계획을 지키려고 하는 긴장감과 계획 달성률은 확실히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삶에 있어서 여유를 찾게 되었고 설령 계획했던 것이 무너지더라도 크게 패닉하지 않는 법 그리고 어떻게든 대처해내는 법을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 



계획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매일매일을 그려나가는 데 있어 전혀 쓸모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내가 계획적인 태도를 완전히 인생에서 제거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쏟아지는 계획들 사이에 무계획도 어느 정도 있어야 어느 정도 삶이 윤택해진다는 것이다. 뼈와 뼈 사이 연골이 존재해서 움직임을 낼 수 있듯이, 계획과 계획 사이에도 무계획이 있어야 매일매일의 움직임이 조금 더 순조로워지는 것을 스무살이 넘어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최근 들어 매일 해 낼 것을 끊임없이 해내고 있음에도 무기력함을 느끼는 분들에게, ‘무계획’이라는 작은 묘목을 심어볼 것을 조심스레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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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8-01 19: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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