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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권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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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은 늘 나쁜 걸까? – 감정의 ‘잠시 보류’라는 선택


가족을 떠나보냈다거나, 오랜 관계가 끝났을 때, 혹은 큰 수모를 겪고 나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을 본 적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종종 걱정 섞인 시선을 보낸다. “그렇게 참다가는 언젠가 터져요.” “감정을 표현해야지, 억누르면 병 돼요.”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억압’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억압은 방어기제 중 하나로, 너무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의식하지 않게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는 마음의 작용이다. 억압은 우리가 직접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기억이 떠오르지 않게 차단한다. 어떤 사람은 이 때문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장례식을 치르고, 어떤 사람은 폭력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면서도 오히려 아무 감정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억압이 꼭 나쁜 것일까? 무조건 그렇다고 보긴 어렵다.


방어기제는 나쁜 게 아니다


정신역동이론에서는 방어기제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 불안을 견디는 다양한 심리적 기술을 설명한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 안의 충동(하고 싶은 것)과 도덕(하면 안 되는 것), 현실(지금 가능한 것) 사이에서 갈등이 생긴다. 그럴 때 이 셋 사이를 중재하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자아’다.


하지만 자아가 그 갈등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큰 불안을 느낄 때, 그 불안을 줄이기 위한 자동적 반응이 나타난다. 그게 바로 방어기제다. 즉, 방어기제는 우리를 괴롭히는 감정이나 생각으로부터 마음을 지키기 위한 심리적 안전장치라고 볼 수 있다.


방어기제는 심리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지나치게 자주 사용되면 현실을 왜곡하거나 자기 인식을 흐릴 수 있다. 감정이나 갈등을 계속 피하다 보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직면하지 못하고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 특히 방어기제가 자동화되면, 자신의 감정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대인 관계나 삶의 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문제를 덮는 데 익숙해질수록, 마음의 회복 탄력성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


이 방어기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것은 상황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부정, 어떤 것은 감정과 기억을 분리해서 의식하지 않으려는 해리, 혹은 남 탓으로 돌리는 투사 같은 것들이다. 억압도 이 중 하나다. 사람마다 어떤 방어기제를 주로 쓰는지는 다르다. 중요한 건 방어기제가 무조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우리가 균형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수단일 수 있다.


억압은 ‘감정의 유예’다


억압은 말 그대로 감정을 잠시 보류하는 것에 가깝다. 지금 느끼기엔 너무 벅찬 감정들, 예를 들어 부끄러움, 분노, 상실감, 죄책감 같은 것들을 지금 당장 느끼면 무너질 수 있으니,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넣어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직장인이 회의 시간에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자. 상사는 고성과 함께 그를 무시했고, 그 자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갔다. 그날 저녁, 그는 친구에게 “회사 생활이 원래 그렇지 뭐”라며 넘겼다. 정말 원래 그런 일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그 자리에선 감정을 억누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처럼 억압은 감정을 ‘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느끼지 않기로 하는’ 선택이다. 나중에 혼자 있을 때 그 감정이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오랫동안 떠오르지 않은 채 남아 있기도 한다. 중요한 건, 억압은 그 순간을 견디게 해줬다는 점이다. 억압을 통해 우리는 때로 삶의 리듬을 유지할 수 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해내고, 일상을 이어간다. 이런 점에서 억압은 부적응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살아내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억압이 항상 해로운 건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억압을 흔히 ‘신경증적 방어기제’로 분류하며, 성숙한 방어기제(예: 유머, 승화 등)에 비해 미성숙한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실제로 억압된 감정이 장기간 누적되면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거나 감정이 폭발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억압이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김진숙 등의 2008년 연구에서는 정서적으로 안정된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들이 억압을 많이 사용하면서도 적극적인 스트레스 대처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억압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이 어떤 삶의 태도 및 환경과 함께 작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심리학자 조지 베일런트(George Vaillant)는 『성공적인 삶의 심리학』에서 리처드 스토버라는 인물의 사례를 통해 이 점을 강조한다. 스토버는 억압을 주요 방어기제로 사용했지만, 친밀한 인간관계와 사회적 지지를 풍부하게 누림으로써 건강하고 안정된 삶을 살았다. 이처럼 억압은 감정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잠시 숨기는 것’에 가까우며, 때로는 마음의 균형을 지키는 데 기둥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억압을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결론: 억압은 나쁜가, 아니면 필요한가?


억압은 마치 책상 서랍과도 같다. 당장 처리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기억을 그 안에 넣어두고 우리는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삶을 이어간다. 물론 그 서랍을 영영 열지 않으면 언젠가는 감정이 썩거나, 터져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서랍이 있었기에 우리는 감정의 폭풍에 휘말리지 않고 지금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억압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삶을 지속하기 위한 나름의 지혜일 수 있다. 억압하는 사람에게 “억압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기보다는, 그 억압이 어디서 오는지,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함께 이해하려는 태도가 더 필요하다.


억압은 우리가 감정을 잠시 내려놓고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조용하지만 중요한 심리적 도구다. 그 억압을 단죄하기보다 때로는 존중해주는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김진숙, & 안창일. (2008). 애착 유형에 따른 억압의 강도와 스트레스 지각 및 대처방식. Korean Journal of Clinical Psychology, 27(4), 1019-1037.

Wikipedia contributors. (n.d.). 방어 기제. Wikipedia. Retrieved July 7, 2025, 

from https://ko.wikipedia.org/wiki/%EB%B0%A9%EC%96%B4_%EA%B8%B0%EC%A0%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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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08-07 10: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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