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진우
[한국심리학신문=채진우 ]
누군가를 처음 만났지만 그 사람의 말투, 동작, 상황 전개까지 모두 기억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공간인데도, 그곳의 구조와 풍경이 마치 어릴 적 사진 속 배경처럼 익숙하게 다가온 적은?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기시감(Deja vu)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 느낌이 단순한 “익숙함”을 넘어, 내가 이 장면을 이전에도 겪었고 심지어 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알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당신은 지금 데자 브이쿠(Déjà vécu)를 경험한 것일 수 있다.
'데자 브이쿠'는 프랑스어로 ‘이미 살아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뇌가 특정 상황을 처음 겪으면서도, 그것을 이미 과거에 겪었다고 믿는 인지적 착각을 말한다. 보통 사람들도 한두 번은 겪을 수 있는 기시감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강한 확신과 몰입을 동반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현상을 겪는 사람은 단순히 “익숙하다”고 느끼는 수준을 넘어서, “이 장면을 똑같이 살아본 적이 있다”고 굳게 믿으며, 그에 따라 현재 상황을 해석하고 반응하게 된다. 심지어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기억은 뇌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된다. 데자 브이쿠 현상은 그러한 기억의 시스템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기억 인식 오류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그 정보가 실수로 장기 기억 저장소에 이미 있는 것처럼 처리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뇌의 해마나 측두엽, 전두엽 등 기억과 인지를 담당하는 영역 사이의 신경 연결 이상이나 일시적인 오류로 설명된다.
가장 유력한 이론 중 하나는 ‘정보의 처리 속도 차이’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동일한 정보를 서로 다른 채널로 두 번 입력받을 수 있는데, 이 때 아주 짧은 시간차를 두고 정보가 두 번 처리되면 두 번째 입력은 이미 알고 있던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데자 브이쿠는 때로는 신경학적 또는 정신의학적 질환의 전조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측두엽 간질 환자들은 발작 직전 생생한 데자 브이쿠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를 예측 가능한 ‘재현된 장면’처럼 느끼며, 실제로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듯한 혼란을 경험한다.
또한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 루이체 치매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에서도 데자 브이쿠 현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강박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등 정신적 질환에서도 보고된 사례가 있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단순한 착각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뇌 신경계의 이상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데자 브이쿠 자체는 반드시 병리적인 상태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빈도가 지나치게 잦거나 일상생활에 영향을 줄 만큼 강도 높은 수준으로 발생한다면,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필요하다.
이 경우, 신경과적 검사와 정신의학적 평가를 통해 기저 질환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간질이나 치매와 같은 신경질환이 있는 경우는 해당 치료를 통해 증상이 완화될 수 있으며, 정신적인 원인이 의심될 경우 인지행동치료나 약물요법이 사용되기도 한다.
수면 부족, 스트레스, 약물 남용 등의 일상적 요인도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휴식과 생활습관 개선만으로도 증상이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데자 브이쿠는 단순한 뇌의 오류라는 과학적 해석 외에도, 인간 존재와 시간, 기억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현재’라고 인식하며, 기억은 어떤 방식으로 과거를 구성하는가?
일부 철학자들은 데자 브이쿠 현상을 통해 시간의 연속성이 환상일 수 있음을 제기하고, 일부 종교적 해석에서는 이 현상을 전생의 기억, 또는 평행세계와의 접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해석은 과학적 근거보다 상징적 의미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만큼 데자 브이쿠라는 현상이 인간의 정체성과 인식의 경계에서 매우 흥미롭고 복잡한 주제라는 점은 분명하다.
처음 겪는 장면인데도 이미 경험한 것 같고,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까지 아는 것 같다는 착각. 그것은 우리가 가진 기억이라는 도구가 얼마나 섬세하면서도 때로는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데자 브이쿠는 단순히 '뇌가 실수한 순간'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생생하고 철학적인 체험이다. 익숙함이란 무엇인지, 진짜와 가짜 기억은 어떻게 구분되는지, 인간은 과연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 짧고도 강렬한 현상은, 어쩌면 우리의 기억과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은 균열일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Perrin, D., Moulin, C. J. A., & Sant’Anna, A. (2023). Déjà vécu is not déjà vu: An ability view. Philosophical Psychology, 37(8), 2466–2496. https://doi.org/10.1080/09515089.2022.216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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