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윤설화.’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부터
장하율의 마음속 어딘가가 조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익숙했다.
마치… 오래전 꿈에서 만난 사람처럼.
과거, 서늘한 골방의 기억
열세 살 무렵,
하율은 서당 자두나무 아래서 이상한 소녀를 만났다.
낡은 치마저고리, 벗겨진 버선,
그리고 유난히 깊고 검은 눈동자.
“…누구냐.”
하율의 질문에,
그 아이는 나뭇잎을 쥔 채로 이렇게 말했다.
“이름을 말하면, 꿈에서 날 보게 될 거야.”
아이 같지 않은 말투.
그 눈빛은 이미 무언가를 다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설화야. 내 이름.”
그날 이후, 그녀는 서당 주변에서 자취를 감췄고
하율의 기억 속에서도 흐릿해져만 갔다.
현재, 윤설화의 방
“설화 언니, 또… 꿈 이야기하셨어요?”
고요한 방 안, 은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엔 마른 약초와 닭백숙이 담긴 사발을 들고 있다.
“언니, 이제 그만 좀… 자요. 밤마다 주문을 중얼거리면… 병납니다.”
설화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병이 나야 누가 날 찾지.”
“언니…”
설화와 은애, 두 그림자의 대화
은애는 설화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문득 말했다.
“…나도 옛날에 꿈만 꾸던 애였어요.”
설화가 고개를 돌렸다.
“양반댁 마님이 내 엄니였어요.
하지만 난 첩의 딸이라고, 종으로 끌려왔죠.”
“…그랬구나.”
“언니도… 그런 거죠? 그 눈은… 말 안 해도 알아요.
매 맞고, 갇히고, 물도 못 마신 채… 기어다니던 기억.”
설화의 손이 잠시 떨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아요.
언니가 왜 꿈에 집착하는지.
왜 현실을 못 믿는지도.”
은애는 설화의 손을 조용히 감쌌다.
“근데 언니.
진짜 꿈 같은 사람을…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어요.”
은애의 은밀한 고백
설화가 고개를 들었다.
은애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 저기 양반댁 도련님이요.
김응철 대감의 막내, 김세윤 도련님.
저, 그이랑… 몰래 만나고 있어요.”
설화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웃었다.
“…은애, 너답지 않게 대담하네.”
“그 사람은 내가 종이든 아니든, 안 가려요.
…나중에요, 진짜로 나 데리고 나간대요.”
설화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 속에는 조금의 부러움, 그리고… 아주 작게, 희망이 비쳤다.
밤, 하율의 회상
장하율은 방 안에서 과거를 떠올렸다.
그리고 확신했다.
‘설화… 그 아이였구나.
오래전, 나에게 사과를 받아 들고 웃던 그 아이.’
작가의 말:
어쩌면 사람의 운명은 아주 어릴 적,
단 한 번의 시선과
조용한 따뜻함으로 결정되는 걸지도 모릅니다.
설화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 곁엔,
같은 상처를 지닌 은애가 있었고,
언젠가 그녀를 꺼내줄 한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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