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그녀를 불렀던 밤
"그 아이는,
처음부터 영(靈)과 가깝게 태어났단다."
설화는 아직 열세 살이었다.
비가 쏟아지던 그 밤, 설화는 양반가 골방에서 달아나
산 너머 무녀의 집에 도착했다.
온몸은 젖었고, 얼굴엔 상처가 남아 있었다.
“왜, 나를 찾았느냐.”
무녀는 묻지 않았다.
그저 설화의 손을 쥐고 말했을 뿐이다.
“너는… 잠든 자들의 마음을 꿰뚫는 눈을 가졌구나.”
무녀의 가르침은 특별했다.
설화는 ‘말’로 사람의 기억을 흔들 수 있었고,
‘상상’으로 남의 꿈을 재현할 수 있었다.
“사람은 낮엔 거짓말을 해도,
밤엔 진심이 튀어나오는 법이지.”
무녀는 그렇게 말하며
밤마다 붉은 등불 아래 설화에게 주문을 가르쳤다.
하지만 설화는 묻지 않았다.
왜 하필 나여야 했는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능력'이란 걸 만들어냈다.
상상이었을지라도.
은애의 비밀
“나리, 여긴— 종들이 쓰는 쪽문입니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온 거예요.”
김세윤.
양반집 막내도련님은 은애에게 다가올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날 밤, 뒷마당 담장 너머에서
은애는 도련님과 처음 마주쳤다.
“종이라도,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 말 한마디가 은애의 가슴에 박혔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밤마다 조용히 만났다.
김세윤은 시를 건네줬고,
은애는 설화의 근황을 조심스레 이야기해주었다.
"…설화 언니가 요즘 더 이상해요.
밤마다 혼잣말도 많고,
종이인형을 태우기도 해요."
김세윤은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은 누구나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만큼 깊이 망가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은애는 밤마다 그 시절을 떠올렸다.
설화가 주문을 따라 중얼거리던 그날들.
그것이 능력이 아니라,
그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허상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김세윤의 말도.
“종이든 누구든…
누군가 한 사람만 진심이면,
세상이 뒤집힐 수도 있는 법이오.”
작가의 말 :
설화는 힘이 아니라, 상처로 살아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마주한 모든 주문과 꿈은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패였을지도 모르죠.
은애는 그런 설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증인이며,
김세윤은 그 시대 속에서 작은 변화의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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