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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월. 경성. 새벽 5시 40분.

세상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림자가 빛보다 많던 시간.

경성 한복판, 조선총독부 청사 외벽엔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청사 3층 사무국의 창문 하나에서만 조심스럽게 등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책상 앞에 앉은 청년의 손끝이 멈춰 있었다.


장해윤.


조선총독부 소속 사무 타자수.

스물셋의 조선 청년.

표정 없는 얼굴로 활자를 치고 있는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 ‘조용한’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찰칵. 찰칵.

타자기의 리듬은 일정했지만,

그 속에 담긴 문장은 그러하지 않았다.


「경성지방 사상범 감시 대상 명단 – 기밀/내부 열람 전용」

해윤의 눈동자가 문서 한가운데 적힌 이름 위에서 멎었다.


박진우.


그는 며칠 전, 함께 한 잔 술을 기울인 친구이자,

총독부 경무국에서 정보선을 이어주던 내부 협조자였다.


‘…벌써 찍혔군.’


해윤은 가슴 안쪽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문서의 활자는 그대로인데,

그 활자를 타자기로 옮겨 적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책상 위엔 복사용 얇은 화선지와 오래된 타자기가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론 방금 벗은 제복 상의가 정갈히 걸려 있었다.


“문서를 확보하되, 새벽 여섯 이전엔 반드시 청사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


이중생활 2년째.

그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장 타자수.”


사무실 문이 덜컥 열리며,

깊은 낮은 목소리가 어둠을 밀고 들어왔다.

해윤은 깜짝 놀라지도, 고개를 급히 돌리지도 않았다.


“…이시카와 과장님.”

“벌써 나와 있었나?”

“연말 결산 자료가 밀려서….”


그는 책상에 있던 봉투를 슬며시 덮으며 말했다.


‘연말 결산’.


그 단어는 실로 유용했다.

지금껏 세 차례나 들키지 않고 넘어간 건,

바로 그 행정자료 덕분이었다.

이시카와는 무심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조선인들과도 조선어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그 일본 관리자는,

그러나 누구보다 잔인하고 냉정한 감시자였다.

그는 책상에 놓인 종이 더미를 흘끔 훑더니 말했다.


“성실하군. 그런 성실함이 가끔은, 불필요한 일까지 관심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지.”

“…예?”

“아니, 그냥 하는 말일세.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말이지.”


이시카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해윤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이내 종이를 정리한 뒤,

가죽 서류 봉투 안에 조심스럽게 문서 복사본을 넣었다.


아침 6시 20분.

그는 이미 청사 밖, 북촌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뒷골목.

오래된 목조 가옥의 뒷문.

문 세 번, 두 번, 한 번— 조용히 두드리는 암호.

문이 열렸다.


“왔는가.”


낡은 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보는 남자.

책방 주인으로 위장한 조직 책임자, 김성진이었다.

그의 뒤편,

좁은 책방 뒷방엔

모자, 수첩, 송진과 인쇄용 종이 더미가 쌓여 있었다.

해윤은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박진우… 걸렸습니다.”


김성진이 봉투를 열자마자 문서 위 이름이 보였다.

그는 무표정하게 종이를 내려다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 고맙네. 박진우는 우리가 조치할 테니, 자넨…”

“괜찮습니다.

……이번엔,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김성진의 손끝이 멈췄다.


“…무슨 말인가.”

“그가 위험해진 건,

제가 넘긴 자료 때문입니다.”

“…해윤.”

“모른 척할 순 없습니다.”


말을 마친 해윤은 벽에 걸린 조선지도를 바라봤다.

그 위에 붙은 핀 몇 개.

연락선. 배포선. 피신로.

그의 시야에선 하나하나, 그 위치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던 건—

삼 년 전, 겨울.

자신의 방 문을 걸어 잠그고 처음으로 ‘이 집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하던 그 밤의 자신이었다.




[3년 전, 해윤의 방]

아버지는 외쳤다.


“가문을 더럽히지 마라!”


그러나 해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방을 나서며,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유서 한 장을 꺼냈다.


‘장해윤은 오늘부로 집안을 떠난다.

남은 자들이 부귀를 좇을 때, 나는 이름을 버린다.’


그는 그렇게 기록을 남기고,

조선의 겨울밤을 나섰다.




[현재, 책방]

“진우가 잡히면,

다음은 자네일 수도 있다.”


김성진은 조용히 말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가문이 널 감시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부친도, 숙부도, 자네를 가만두진 않을 거야.”

“그렇겠죠.

……그들이 지키는 건 ‘가문’이지, ‘조선’이 아니니까요.”


책방엔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해윤은 뒷문을 열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날 아침,

청사 앞 광장엔 신문사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신년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총독부 측의 일정 때문이었다.

모던한 차림의 여성 기자 하나가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시선을 두리번거렸다.


후지카와 나오미.

조선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기자.


그녀는 문득,

청사 정문을 나서는 해윤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눈인사.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는 '서로를 기억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작가의 말 :

장해윤은 조용히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의 마음엔,

타자기로 써 내려간 종이보다

더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날도 살아 있었고,

또한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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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04-28 09: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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