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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1936년 1월 19일. 밤.

총독부 청사 앞에는 어둠이 깃들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는 가운데,

경찰 순사들의 그림자가 인도 위를 오갔다.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가르며,

장해윤은 묵묵히 걸었다.


회색 모직 외투, 헐렁한 중절모,

평범한 청년 노동자로 위장한 그는,

주머니 속 얇은 봉투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박진우의 탈출을 위한 가짜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오늘 밤, 반드시 전달해야 한다.

성공할 경우, 박진우는 경성 밖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실패할 경우—

해윤 자신은 물론,

그를 도왔던 모든 사람들이 처형될 것이었다.


경성 시내는 이미 삼엄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요즘 부쩍 늘어난 신분증 검사,

조선인 대상 불심검문,

골목마다 늘어난 순사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종로 네거리를 지나,

서쪽 골목 작은 찻집 앞에 섰다.


찻집 이름은 ‘청운다실’.

표면상으론 양반가 부인들이 드나드는 고급 다실이었지만,

실제로는 비밀조직의 거점 중 하나였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따뜻한 숯불 냄새와 함께 은은한 꽃차 향이 퍼졌다.


"어서 오십시오."


기모노를 걸친 조선 여점원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빛이 짧게 해윤을 스쳤다.

암호는 통과했다.


해윤은 아무 말 없이 안쪽 구석진 자리로 들어갔다.

차를 주문하는 척,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여점원은 종이를 받더니,

차를 준비하는 척하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후.

찻집 뒷마당 쪽 작은 창고 문이 열렸다.

거기엔 박진우가 있었다.

헌색 모직 코트를 걸친 채,

심하게 여윈 얼굴.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또렷했다.


"…해윤."

"오랜만입니다."


둘은 짧게 인사만 나눈 채, 창고 안으로 몸을 숨겼다.

해윤은 재빨리 가짜 신분증을 꺼내 진우에게 건넸다.


"이걸 가지고, 내일 새벽 5시 기차를 타십시오.

삼랑진까지 내려가면, 우리 연결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험한 길이겠군."

"이미 시작된 길입니다."


해윤은 짧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 뒤에는

지독한 긴장과 불안이 감춰져 있었다.


"해윤아."


박진우가 조용히 말했다.


"너, 괜찮겠어?"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해윤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는 돌아갈 다리가 없습니다."


진우는 한참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살아남자.

살아서—

끝까지 가자."

"……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곧,

박진우는 뒷문으로 몸을 숨기듯 빠져나갔다.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눈송이 몇 점이 허공을 헤매듯 떨어졌다.

해윤은 찻집 구석에 혼자 남아,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맛.

그건 지금 그의 심장과 닮아 있었다.




[어린 시절]


겨울밤, 외삼촌은 해윤을 무릎에 앉히곤 말했다.


"진짜 매화는,

가장 추운 겨울에 피는 거란다."

"왜요?"

"봄에 피는 건 쉽지.

하지만 겨울에 피는 건,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거든."


어린 해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알고 있었다.




[현재]


경성 시내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둘 문을 닫는 상점들,

종로통을 가로지르는 순찰대.


그리고—

그 뒤를 쫓는 보이지 않는 감시자들.

해윤은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이미 그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는 걸.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문을 나섰다.

찻집을 나선 그는

눈 덮인 길을 따라 걸었다.


걸음은 일정했지만,

등 뒤로 뻗어오는 시선은 점점 무거워졌다.


‘늦지 않아야 한다.

이 밤을 무사히 넘겨야 한다.’


심장은 조용히 뛰었고,

손끝은 식어갔다.

그리고—

골목 어귀를 돌던 순간.


"거기 서라!"


순사의 고함이 어둠을 찢었다.

해윤은 순간 멈칫했지만,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발 속을,

그는 쉼 없이 달렸다.




작가의 말 :

3화는 첫 번째 진짜 위기였다.

장해윤은 처음으로 ‘자신’이 아니라 ‘동지’를 살리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그는 더 이상

타자기 앞 조용한 첩보원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총구 앞에 선

'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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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04-30 10: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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