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경성, 1936년 1월 19일. 밤.
"거기 서라!"
순사의 외침이 골목을 울렸다.
장해윤은 눈발 속을 내달렸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찬 바람이 숨통을 죄어왔다.
뒤에서 거칠게 쫓아오는 발소리.
삐걱거리는 군화 소리,
휘파람 같은 호루라기 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잡히면 끝이다.'
해윤은 머릿속으로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잡히면 고문, 체포, 그리고 죽음.
살아서 빠져나올 길은 없다.
그는 골목을 빠져나와 좁은 샛길로 몸을 틀었다.
빙판을 밟아 휘청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눈을 뚫고 길을 가로지르는
한 마리 짐승처럼,
해윤은 다시 발을 굴렸다.
몇 번의 모퉁이를 돌아
한적한 뒷골목에 다다랐을 때.
뒤쫓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는 숨을 죽이며 벽에 몸을 기대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아직은, 살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박진우는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그는 약속대로 새벽 기차를 탔을까?
해윤은 차가운 손을 모아 쥐며
애써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조직에 연락을 넣어야 한다.
연락망을 통해 진우의 행방을 확인해야 해.'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눈 덮인 골목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불과 몇 시간 전]
찻집 ‘청운다실’의 뒷문.
박진우와 마지막 악수를 나누던 순간.
진우는 짧게,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해윤아.
혹시 내가 넘어가더라도,
널 팔지는 않을 거다."
그 말은 웃으면서도 비참했다.
이미 박진우는 감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끝까지 도망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해윤도 알고 있었다.
[현재]
해윤은 북촌 골목 깊숙이 위치한
비밀 연락 거점으로 향했다.
좁은 골목 안, 오래된 기와집 뒷마당.
새끼줄에 매달린 허름한 깃발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신호는 없다.'
아무도 그를 맞이하지 않았다.
계획대로라면,
박진우가 무사히 빠져나갔을 경우
여기 붉은 끈 하나를 묶어둘 예정이었다.
하지만 붉은 끈은 없었다.
오로지 바람만이 깃발을 흩날리고 있었다.
해윤은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불길함이
등뼈를 타고 기어올랐다.
그때,
골목 건너편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모노 차림, 검은 외투,
그리고 번들거리는 구두.
이시카와 다케루.
조선총독부 사무국 제3과장.
조선인 감시와 첩보 업무를 총괄하는 악명 높은 인물.
해윤은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었다.
이시카와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해윤을 향해 천천히 웃었다.
"장 타자수."
"……과장님."
"이렇게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이지?"
"…산책 중이었습니다."
"이 눈발에?"
이시카와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몇 걸음 더 다가왔다.
"나는 늘 궁금했네.
조선인 중에도 가끔
참으로 우아한 변명을 하는 자들이 있으니 말이야."
"……."
"그대도 그중 하나인가?"
짧은 정적.
눈발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해윤은 몸을 숙이며 말했다.
"변명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흐음."
이시카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해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심하게, 장 타자수.
요즘 경성이 시끄럽다.
너무 바람을 맞으면…
병이 들지 않겠나?"
그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그만큼 더 잔혹했다.
이시카와는 마지막으로 해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골목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해윤은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숨도 쉬지 않고.
들켰을까?
아니면 아직, 기회를 주는 걸까?
모든 생각이 머릿속을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 밤.
눈발 속에서 해윤은 조용히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방어가 아니다.
반격이다.
작가의 말 :
4화는 장해윤이 처음으로
‘사냥당하는 입장’이 되었던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위기 속에서,
더 깊고 단단한 의지를 품는다.
그의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