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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는 겨울에 핀다》 5화 - 5화. 검은 그림자
  • 기사등록 2025-05-07 08:33:59
  • 기사수정 2025-05-07 08:3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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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1936년 1월 20일.


새벽이 오기 전,

세상은 가장 짙은 어둠을 품는다.

장해윤은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은 채,

차가운 새벽 골목을 걷고 있었다.


어젯밤,

이시카와 다케루와 마주쳤던 기억이

머릿속을 끈적하게 감싸고 있었다.


"조심하게, 장 타자수."


그 목소리.

어딘가 그 말투에는 확신이 있었다.

마치,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들켰다.’


그건 직감이었다.

이시카와는 이미 의심 이상의 확신을 품고 있었다.

아마, 아직 증거만 손에 넣지 못했을 뿐.


‘박진우는…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그는 어젯밤 이후

진우로부터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

그 사실이, 더 깊은 불안을 불러왔다.


북촌 언덕 위.

비밀 연락 거점이 있는 옛 기와집에 도착했을 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약속대로라면,

오늘 새벽까지 ‘안전 신호’가 올라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붉은 끈도, 표시도 없었다.

대신—

문 앞엔

누군가 남긴 작은 흔적.

부러진 머리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경고다.'


그것은 조직 내 비상 신호였다.


'이미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다'는 의미.


해윤은 숨을 죽이며

곧장 문을 열지 않고 돌아섰다.

바람은 매서웠고,

눈송이는 고요하게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종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


혹시... 내부에 첩자가 있는 건 아닐까?


정보가 너무 빨리 새고 있다.

박진우의 체포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해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직 안에도, 총독부에 매수당한 자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첩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조심스레 골목을 빠져나오던 그때.


"장 타자수님."


누군가 그를 불렀다.

흰 저고리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사내.

왼손엔 종이 봉투를 들고 있었다.


"…누구요?"

"김성진 선생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사내는 봉투를 내밀었다.

해윤은 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봉투를 받아 들고,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엔

짧은 쪽지 하나가 있었다.


"곧 그곳으로 가게.

더 이상 머물 수 없다."


그는 쪽지를 재빨리 불에 태워 버렸다.


'이젠 숨을 곳도 없다.'


심장은 조용히 뛰었지만,

손끝은 서서히 굳어갔다.


그날 밤.

해윤은 종로의 허름한 여관방 한 구석에 몸을 숨겼다.

온종일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단 한 통의 편지도, 신호도 없었다.


차가운 방 안.

그는 외투를 벗지 않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과거]

외삼촌이 죽던 해 겨울.

가족들은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일본 총독부의 치적을 칭송하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래도 일본 덕에 먹고 살 수 있게 된 거야."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어린 해윤은 조용히 일어섰다.

그때부터 그는 가족과 함께 숨 쉬지 않았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현재]

그는 긴 겨울밤을 지새우며 생각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거는가.


동이 틀 무렵.

방 밖으로 발소리가 들렸다.


"장해윤!

안에 있는 거 다 안다!"


일본 순사들의 거친 목소리.


'드디어 왔구나.'


해윤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주머니 속, 작은 단도 하나를 꺼내 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등지고 섰다.




작가의 말 :

5화는 장해윤이 완전히 고립되는 순간을 그렸다.

이제 그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동지도, 가족도, 자신마저도.

진짜 '겨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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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5-05-07 08:3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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