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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정연수]



현대 가족치료는 이제 단순한 문제해결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진화하고 있다. 후기 가족치료는 포스트모더니즘, 구성주의, 사회구성주의, 페미니즘 등 다양한 사상적 토대를 바탕으로 기존의 병리 중심 접근을 넘어서고 있으며, 치료자의 권위가 아닌 내담자의 삶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는 치료 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후기 가족치료의 철학적 전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초기 가족치료는 명확한 문제 정의와 그에 따른 개입 중심의 ‘모더니즘’적 관점을 따랐다. 이 시기의 치료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반면, 후기 가족치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에서 다원성, 탈중심성, 상대주의의 세계관을 반영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적 진리나 객관적 기준을 거부하며, 각자가 자신만의 ‘우주(multiverse)’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가족치료에서도 ‘정답’을 찾는 것보다, 각 가족 구성원이 의미를 어떻게 구성하고 살아가는지를 이해하는 데 무게를 싣는다. 치료자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함께 재구성하는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1차와 2차 사이버네틱스: 치료자의 위치 이동



후기 가족치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이버네틱스 개념의 변화, 즉 1차에서 2차 사이버네틱스로의 전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차 사이버네틱스는 치료자를 외부 관찰자로 상정하고, 가족체계를 관찰하고 개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2차 사이버네틱스는 치료자 역시 체계 안의 일원으로 본다. 치료자의 가치관, 세계관, 언어 사용 등이 치료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하고, 치료자는 ‘객관적 전문가’가 아닌 ‘자기준거적 참여자’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관점은 상담자로서 나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나 역시 실습 과정에서 상담 장면에 들어갈 때, 내가 무언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과 조급함에 사로잡힌 적이 많았다. 그러나 후기 가족치료 관점은 상담자가 반드시 해결을 주도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해방감을 주었다. 이제는 ‘나의 프레임’에만 의존하기보다, 내담자의 프레임을 함께 탐색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함께 써 내려가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언어와 이야기: 실재를 구성하는 도구



후기 가족치료에서는 언어가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라 실재를 구성하는 도구로 여겨진다. 우리가 어떤 언어로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어떤 이야기로 기억을 조직하느냐에 따라 현실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이야기치료’(Narrative Therapy)의 철학적 기반이기도 하다.


이 관점을 실습 현장에서 활용하며 느낀 점은, 청소년 내담자들과의 상담에서 특히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단 따돌림을 경험한 내담자가 자신을 ‘소외된 사람’, ‘문제아’로 정의할 때, 그 언어는 그 자체로 내담자의 세계를 제한하고 고착화시킨다. 하지만 상담자는 그 언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예외적 경험을 탐색하거나 숨겨진 강점의 서사를 함께 발견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언어의 힘을 체험할 때마다, 나는 상담이라는 작업이 얼마나 섬세하고 창조적인 과정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사회구성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자아



사회구성주의는 ‘자아’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된다고 본다. 즉, 인간은 관계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이는 상담 장면에서 ‘관계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청소년 상담 현장에서 이러한 관점은 특히 중요하다. 많은 청소년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거나 ‘다른 사람 눈치만 본다’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개인 내면만을 들여다보기보다, 그 청소년이 속한 관계 맥락을 함께 탐색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의 정체성은 그저 ‘내 안’에서 고립된 것이 아니라, 부모, 친구, 선생님, 사회적 맥락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 구조주의와 해체주의: '진실'에 대한 비판



후기 구조주의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진실’이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푸코와 데리다의 사상은 특히 이야기치료에 영향을 주며, 상담자는 지배적 담론에 의해 형성된 내담자의 자기 이해를 해체하고, 더 풍부하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는 상담자 자신에게도 확장된 시야를 요구한다. ‘어머니가 문제의 원인이다’, ‘남성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와 같은 이분법적 해석은 내담자의 세계를 오히려 좁게 만들 수 있다. 나 역시 상담 과정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할 때, 무의식적으로 특정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닌지 자주 점검하게 된다. 후기 가족치료는 상담자가 끊임없이 자기 반성을 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깊이 있는 윤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페미니즘과 치료: ‘개인의 문제는 사회적 문제다’



후기 가족치료는 페미니즘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전통적으로 ‘개인의 문제’로 여겨지던 많은 심리적 고통은 실제로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다. 특히 여성의 역할이나 성차별, 억압 구조에 대한 인식 없이 개인만을 변화시키려는 치료는 근본적인 치유에 도달하기 어렵다. 따라서 상담자는 내담자가 속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민감하게 읽어내고, 그에 따라 해석의 틀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 여학생을 대상으로 집단상담을 진행하면서, 나는 이들이 겪는 어려움 속에 사회문화적 맥락이 깊이 얽혀 있음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특히 외모와 관련된 자기 평가나 자존감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고민을 넘어, 미디어와 사회가 지속적으로 주입해온 외모 중심적 가치관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참가자들 중 일부는 ‘예쁘지 않으면 인정받기 어렵다’는 믿음을 내면화하고 있었고, 이는 또래관계에서의 불안, 회피, 심지어 자기혐오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상담 과정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외부 기준이 어떻게 형성되고 반복되는지를 함께 탐색했으며, 이를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의 가치가 외모에 국한되지 않음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공감이나 지지에서 그치지 않고, 고정된 인식에서 벗어나 자신을 재정의하는 ‘주체화의 과정’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러한 순간들 속에서 상담이 개인의 내면을 돌보는 것을 넘어, 사회적 틀을 흔들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치료는 지식이 아니라 관계이며, 대화이며, 함께 쓰는 이야기다.



후기 가족치료는 고정된 진단이나 정해진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열려 있는 대화의 공간을 지향한다. 이러한 치료 접근은 상담자에게 더 많은 유연성과 자기 성찰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가 지닌 복잡성과 그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상담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후기 가족치료가 강조하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이야기를 존중하고 함께 새롭게 써 나갈 때 내담자의 삶은 변화의 가능성을 맞이하게 된다. 나 또한 상담자로서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내담자의 삶에 새로운 빛이 스며들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참고문헌


1) 신혜종. "가족 상담 및 치료의 현황과 과제: 일 학회 발표 사례를 중심으로." 가족과 가족치료 23.4 (2015): 781-800. 

2) 조성봉,노미화,and 김현수. "한국가족치료학회지 분석을 통한 가족치료 연구의 동향분석: 비치료연구를 중심으로." 가족과 가족치료 27.1 (2019): 149-180. 

3) 한지수(Ji Soo Han),and 최연실(Youn Shil Choi). "공통요인(common factors)을 통해 본 구조적 가족치료와 통합적 행동부부치료(IBCT)의 통합적 적용 가능성 및 가족치료적 함의." 가족과 가족치료 29.2 (2021): 359-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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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06-02 08: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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