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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평소처럼 4교시가 끝나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도시락을 들고 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창가 자리에 남아 있는 김도현이 나를 잠깐 바라봤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

나는 윤태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 자리,


아무도 모르게 다시 원래의 책이 돌아와 있었다.

서랍을 열자

그 안에는 낡은 스케치북 하나가 있었다.

윤태가 그림을 좋아했다는 건

소수만 알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펼쳤다.

첫 장은 교실을 내려다보는 시점의 풍경.

두 번째 장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의 무표정한 얼굴.


세 번째 장—


나는 손이 멈췄다.

그곳엔

지워진 얼굴들이 있었다.

연필로 그려진 20여 명의 학생들.

모두의 몸은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지만,

얼굴은—

모두 지워져 있었다.

윤태는

누구의 얼굴도 기억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기억하기 싫었던 걸까.

그림 가장자리에 작게 적혀 있던 글.


“너희는 모두,

나를 보지 않았다.”


그때,

내가 가끔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윤태는 혼자 스케치북에 몰두하곤 했고,

가끔 누군가 다가오면

그림을 재빨리 덮었다.

그는 두려워했던 걸까.

그림을 들키는 걸?

아니면,

자신의 분노가 드러나는 걸?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거기엔—


하나의 얼굴만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를 응시하듯

조심스럽게 그려진 한 사람의 얼굴.

머리가 짧고,

표정이 차분한 그 얼굴.


그건—

나였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그가 내게 했던 짧은 말을 떠올렸다.


“너는…

날 안 무서워해.”


그 말을 들은 이후,

나는 윤태가 매일 조금씩 내 책상 옆에

작은 접힌 종이를 놓고 갔다는 걸 알았다.

그 종이엔

단 한 마디 말만 있었다.


“고마워.”




작가의 말 :

9화는 고윤태가 남긴 마지막 유산,

지워진 얼굴들의 스케치북을 통해

그의 내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장면입니다.

이 에피소드는

사회적 투명인간화(social invisibility)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존재하되,

서로를 보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 교실.

그 속에서 고윤태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으며,

한 사람만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이서,

즉 윤태가 끝까지 신뢰하고 싶었던 단 한 사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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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05-29 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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