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정이서는 혼자서도 이끌리지 않을 만큼 낡고 먼지 낀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지하 1층. 평소라면 학생 출입이 금지된 구역.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알았다.
이 학교의 진짜 비밀은 복도나 교실에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록 속에 숨어 있다는 걸.
손전등 불빛 아래, 오래된 문서 보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제 선반에는 색이 바랜 출석부와 상담일지, 교직원 보고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정이서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바짝 마른 손가락으로 한 권 한 권 문서를 꺼내기 시작했다.
“2017년… 2학년 3반…”
낡은 출석부 속, 한 페이지가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당시 2학년 3반 명단에는 현재 기억하는 인원보다 다섯 명이나 더 많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도윤
신세아
장예빈
윤강우
정시후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섯 명 모두의 이름 위에는 굵은 검은 펜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전출] 2017.11.04
이상했다.
같은 날, 다섯 명이 모두 전출을 간다는 것.
그것도 별다른 주석도 없이, 단순히 선 하나로 지워낸 듯한 기록.
정이서의 손끝이 떨렸다.
그 날짜는, 고윤태가 정신과 병원에 입원한 날짜와 정확히 일치했다.
“이서야!”
복도 끝에서 민재가 다급히 뛰어왔다.
정이서는 반사적으로 출석부를 가방에 숨겼다.
“여기서 뭐 해?”
민재가 숨을 골랐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도서부 맡은 거 정리 좀 하느라.”
“너… 요즘 윤태랑 많이 다니지?”
민재의 목소리에 망설임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 애, 위험한 애야. 작년에... 윤태랑 친하게 지냈던 애가 있었거든? 근데, 갑자기 자퇴했어. 아무 말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이름이 뭐였는데?”
정이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세아. 기억 안 나?”
민재는 정이서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작고 하얀 피부에 긴 머리… 네가 1학년 때 동아리 같이 했던 애잖아.”
머릿속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
정이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신세아? 그 이름을 내가 왜 기억 못 하지?’
그날 밤.
정이서는 책상 앞에 앉아, 윤태의 스케치북을 다시 펼쳤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림은 점점 선명해지고, 현실적인 묘사로 바뀌어갔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윤태가 잊히기 전의 누군가들을 되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한 장의 그림 앞에서 손이 멈췄다.
그림 속에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그려져 있었다.
주변은 온통 검은 선으로 뒤덮여 있고, 소년의 얼굴은 일부가 지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 쓰인, 낯설고도 익숙한 글씨.
“내가 다 지웠어. 이제 남은 건 너뿐이야.”
이상했다.
이건 윤태의 필체가 아니었다.
정이서는 조심스레 노트를 들고 조명에 비춰보았다.
글씨의 획, 압력, 방향성. 이건... 누군가가 덧붙인 것이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장면.
상담일지 속 담임교사 ‘장민우’의 필체.
정이서는 재빠르게 서랍에서 상담일지를 꺼내 펼쳤다.
그리고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렀다.
‘같았다. 완전히, 똑같았다.’
정이서는 곧장 침대 옆 공책에 메모했다.
2017.11.04: 5명의 전출 / 윤태 첫 입원
이름: 이도윤, 신세아, 장예빈, 윤강우, 정시후
스케치북 내 존재함. 현실에서는 존재 기록 없음
담임 장민우 = 글씨 동일?
“이게… 단순한 전학이 아니야.”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지 윤태의 환상도, 무의식도 아니었다.
누군가, 이 교실의 과거를 지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쥐고 있는 건 단 하나.
윤태의 그림 속 ‘지워진 얼굴들’이었다.
작가의 말 :
이번 화에서는 정이서가 본격적으로 퍼즐 조각을 맞춰가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지워진 얼굴들, 조작된 전출 기록, 그리고 ‘기억에서 사라지는 아이들’이라는 핵심 플롯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함께 추리해보세요.
이 교실의 진짜 공포는 귀신이 아니라, 지워지는 존재입니다.
곧 더 충격적인 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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