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교실 창밖으로 불어오는 초겨울의 바람은 생각보다 매서웠다.

해는 높게 떠 있었지만, 아이들의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정시아는 창가에 기대 앉아 조용히 일지를 펼쳤다.


‘하림의 손이 떨렸다. 고윤태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기록은 단순했지만, 시아는 그 미세한 떨림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포착하고 있었다. 

완벽한 반장, 완벽한 학생. 

윤하림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녀의 손끝은 자꾸만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심지어 교과서 페이지를 잘못 넘기거나, 발언 순서를 헷갈리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하림아.”


점심시간, 시아는 일부러 옆자리에 앉았다.


“요즘 좀 피곤해 보여.”


하림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냥 반일이 많아서 그런가 봐.”


시아는 젓가락을 내려두었다.


“…그날, 윤태랑 무슨 얘기했는지 기억나?”


하림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을 시아에게 맞추지 못했다.


“안부 정도? 그냥… 별거 없었어.”

“그래?” 시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요즘 매일 아침, 너 교탁 근처만 닦더라.”


하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젓가락을 손에서 내려놓았을 뿐. 

시아는 더 묻지 않았다. 

침묵은 때론 대답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


그날 오후, 시아는 상담실을 찾았다. 

송수진 교사는 예상보다 당황한 얼굴로 시아를 맞았다.


“또 무슨 일 있니?”

“윤태가 여기서 상담받았던 적 있나요?”


송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는 공식 상담을 받은 적 없단다.”

“하지만 일주일 전, 윤태는 상담실에 왔어요. 제가 봤어요. 선생님도 그때 안에 계셨잖아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송 교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상담이라기보다는… 생활 지도였어. 교장 선생님 지시로 면담을 한 거야. 수업 태도나, SNS 관련해서 몇 가지 문제 제기가 있었거든.”

“혼냈다는 거군요.” 


시아는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가 조금… 예민했거든. 분위기를 자주 흐리기도 했고…”

“그 아이가 아니라, 고윤태예요.”


밤.

시아는 고윤태의 SNS 계정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대부분의 게시물은 삭제된 상태였다. 

하지만 미리 캡처해두었던 이미지 한 장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내가 사라져야 끝날 거야. 그래야 다들 편하겠지.’


배경엔 시간표가 흐릿하게 깔려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 손글씨처럼 보이는 작은 글씨가 덧붙여져 있었다.


‘하림.’


정시아는 다시 펜을 들어 일지에 적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가 사라지길 바라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익명의 메시지였다.


[고윤태의 책상 밑을 확인해보세요.]


다음 날 아침.

정시아는 아직 비어 있는 고윤태의 자리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이들이 오기 전, 교실은 고요했고 햇살만이 바닥을 길게 훑고 있었다.

그녀는 책상 밑을 살폈다. 

낡은 테이프 자국 위에,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얇은 종이 한 장.

글씨는 삐뚤고 번져 있었지만,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왜 나만 기억하는 거지. 분명 너희도 거기 있었잖아.’


시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문장은 단지 과거의 고백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향한… 고발이었다.




작가의 말 :

이번 12화는 고윤태가 남긴 ‘보이지 않는 흔적들’과 정시아의 촘촘한 관찰력이 맞물리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침묵은 말보다 큰 소리일 수 있죠. 다음 화에선 드디어 ‘조현빈’이 움직입니다. 그가 감추고 있던 기억, 그리고 진실의 균열이 시작됩니다. 긴장 놓지 마세요.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sytimes.co.kr/news/view.php?idx=10391
  • 기사등록 2025-06-04 09:27:56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