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그날 5시 12분. 4층 음악실 뒷문.
네가 먼저 와 있었지.”
조현빈의 말은 가시처럼 박혔다.
짧고 명확한 문장이었지만, 그 여운은 지나치게 길었다.
정시아는 말이 없었다.
움찔하는 눈꺼풀, 조용히 뜨거워지는 목덜미, 자신도 모르게 쥐어진 주먹.
현빈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교실을 나갔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은 마치 선언이라도 한 듯 무겁고 또렷했다.
“정시아 학생.”
상담실에서 송수진 교사가 시아를 불렀다.
서늘하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요즘 들어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네가… 윤태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얘기. 혹시 들어봤니?”
시아는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예상보다 차가운 눈빛이었다.
“소문은 늘 돌죠. 하지만 소문엔 진실보다 결핍이 많아요.”
송 교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너는 이 교실에서 무엇을 보려는 거니?”
“‘왜’가 아니라 ‘무엇’인가요?”
“그 아이가 죽은 이유, 다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네가 그걸 밝혀낸다고 해서, 누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시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는 기억해야 하니까요.
윤태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지워지고 있으니까.”
그날 저녁, 시아는 기숙사 방 안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5시 12분… 난 그날 그곳에 있지 않았어. 아니, 정확히는…”
머릿속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기억은 명확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지워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자꾸 그날의 ‘조용한 소리’를 떠올렸다.
신발 끄는 소리, 누군가 멀어지는 발걸음, 그리고… 책상 위에 떨어지는 무언가의 마찰음.
“떨어졌다기보단… 밀려난 거야.”
그 순간, 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서랍을 열고, 다시 그날의 메모를 꺼냈다.
왜 나만 기억하는 거지.
분명 너희도 거기 있었잖아.
그 문장을 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그 문장에 겹쳐보았다.
…왜 ‘나도’ 기억하고 있는 거지.
다음 날 아침.
정시아는 조현빈을 찾아가 한마디 했다.
“네가 봤다는 그 장면.
진짜로 ‘날’ 본 거야?”
현빈은 웃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넌 지금, 이미 그걸 ‘기억해버린’ 상태니까.”
작가의 말 :
이번 화는 정시아가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의심을 품는 중요한 흐름입니다.
기억의 진실성과, ‘목격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무는 심리적 균열이 시작됐죠.
다음 화에서는 윤하림이라는 캐릭터의 심리적 모순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본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독자의 판단력을 시험하게 될 거예요.
끝까지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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