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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권다미 ]



우리는 종종 타인의 언행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데 능숙하다. 그러나 정작 자기 말과 행동, 태도에 대해서는 그 영향력이나 의도를 잘 모를 때가 많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바르게 처신하고 있다고 믿는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상식적인 선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의 언행은 의식보다 무의식, 이성보다 습관에서 더 많이 나온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가는 타인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이 지점에서 외도와 상간자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외도는 단지 육체적 욕망이나 도덕성의 결핍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복합적인 현상이다. 사람들은 외도를 저지른 이들을 ‘성도착자’나 ‘비정상적인 인물’로 규정짓고 싶어 한다. 그러나 누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으로 태어나는가? 누가 자신의 인생을 불륜과 죄책감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고 싶어 하겠는가?

 

외도는 흔히 격렬한 감정의 충돌과 관계 속에서 시작된다. 당사자들은 그 나름의 해명과 이유를 가진다. 하지만 외도 사실이 밝혀지면, 그 이유와 맥락은 사라지고 남는 건 ‘배신자’라는 낙인뿐이다. 특히 외도에 관련된 제3자, 즉 ‘상간자’에게는 더욱 무거운 이름표가 붙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도 보통의 사람이다. 어떤 이는 기혼이고, 어떤 이는 미혼이다. 어떤 이는 처음이고, 어떤 이는 반복된다. 

 

상간자가 기혼일 경우, 일상에서 열정과 성적 대상이 사라진 지 오래고, 타인과의 관계가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듯 느껴져 그 관계에 빠져들기도 한다. 미혼이라면, 성인 간의 자율적인 만남이라 여기며 그 책임의 무게를 가볍게 느낀다. 특히 상대가 기혼자라는 사실에 묘한 자존감이나 우월감을 느끼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 사람이 나에게 빠졌을 정도라면 내가 매력적이겠지’라는 착각 속에서. 이들은 종종 자신이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자신이 유혹한 것이 아니라 유혹받았다고 믿고 싶어 하며, 외도 상대가 가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자기를 위로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와 다르다. 외도란 결국 ‘가족’이라는 무게를 이기지 못한 도피이자, 일시적인 감정의 일탈일 뿐이다. 상간자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상처를 숨긴 채 살아간다. 

 

상간자에게는 경계가 있다. 초보에서 프로로 발전하며, 점점 관계를 다루는 기술이 생긴다. 자극하는 법, 유혹하는 법, 죄책감을 피하는 법을 배운다. 이런 기술이 쌓이면서 그들은 오히려 감정보다는 관계의 유희나 물질적 이득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배우자 외도로 이혼 경력이 있는 남성이라면 ‘남의 여자를 차지했다’는 식의 쟁취 심리가 작용하기도 하고, 결혼 경험이 있는 여성이라면 목적의식과 전략이 개입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관계의 끝은 대부분 상처로 귀결된다. 법적으로는 간통죄가 폐지되어 상간자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해졌지만, 민사상 책임을 묻는 ‘상간자 소송’은 오히려 증가했다. 간통죄 폐지 이후, 상간자들은 법적 두려움이 줄어든 만큼 더욱 당당해졌고, 때로는 피해자인 배우자를 협박하거나 비난하기까지 한다.


외도 상담을 하는 입장에서는, 감정과 법의 경계를 분명히 해주는 일이 필요하다. 상간자에 대한 법적 대응이 정당한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경우에 대응이 옳은 것은 아니다. 감정의 고통이 법적 해결로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상간자와의 법적 싸움이 자신을 더 병들게 할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어떤 사람은 상간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가족 관계를 지키는가? 이는 단순히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심리와 관계, 상처와 외로움, 욕망과 환상이라는 깊은 심층의 문제다. 상간자는 그저 성적 욕망이 넘치는 존재도, 도덕관념이 결여 된 인간도 아니다. 누구나 그 가능성은 품고 있으며, 차이는 선택의 순간에서 결정된다.

 

‘상간자’라는 이름표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에 새겨지는 도장처럼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을 너무 쉽게 재단하지 않는 성찰이 필요하다. 외도를 ‘사랑’이라 부르며 자신의 선택을 포장하는 이들에게, 진짜 사랑이란 책임을 수반하는 것임을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해’가 ‘용서’가 아님을, 판단이 ‘증오’가 아님을 사회 전체가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약하고 실수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상처 위에 나의 쾌락을 쌓는 선택은, 결코 존중받을 수 없다. 상간자라는 이름표는 결국,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이기심의 반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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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5-06-23 08: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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