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서재
깨어난 하림은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피는 천천히 손가락 틈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곁에서 윤설화가 조심스레 다가와 그 손을 잡았다.
“하림아, 괜찮아. 지금 여기에 있어. 나랑 같이 있어.”
그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설화의 눈동자엔 두려움과 혼란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림은 떨리는 입술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가 다시 돌아왔어. 이번엔... 날 완전히 집어삼키려고 해.”
윤설화는 하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한쪽 눈동자는 또렷했고,
다른 한쪽은 마치 어둠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무기력해 보였다.
“그 아이라는 게... 고윤태야?”
하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책상 밑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꺼냈다.
유리병.
병 안엔 짙은 검붉은 액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건... 꿈 속에서 내가 꺼낸 거야. 윤태가 매번 이걸 들고 있었어. 그리고... 날 가뒀어. 그 안에.”
설화는 숨을 삼켰다.
“하림아, 그건 네 무의식이야. 윤태가 아니라, 너 자신이 널 가두고 있었던 거야.”
그 순간, 유리병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병 안에서 무언가 기괴한 형체가 요동치며 안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들려? 이건... 내가 아닌 무언가야. 나를 빼앗으려 해.”
설화는 두 손으로 하림의 뺨을 감싸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넌 하림이야. 그 누구도 널 빼앗을 수 없어. 그 병 속 목소리도, 윤태의 잔재도. 다 네 안에 있지만, 너는 너야.”
하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손에서 유리병을 놓았다.
병은 바닥에 떨어졌고, 날카로운 파편과 함께 안의 액체가 바닥을 뒤덮었다.
순간, 교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텅 빈 교실 안의 벽이 일제히 진동하더니,
칠판 위에 또다시 무언가가 적히기 시작했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하림은 고개를 들었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듯, 그의 얼굴엔 처음으로 인간다운 생기가 떠올랐다.
“끝까지 가보자.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야.”
설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교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그 너머, 그들이 마주해야 할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
이번 화는 하림의 심리적 전환점을 그린 핵심 장면입니다.
‘유리병’은 트라우마와 억압된 기억의 상징이며,
설화와 하림의 대화를 통해 ‘분리된 자아’와 마주하는 과정을 표현했습니다.
다음 화에선 고윤태의 실체와 진짜 사건의 본질에 가까워집니다.
어둠을 지나, 빛의 실루엣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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