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훈
[한국심리학신문=신동훈 ]
몇 년 전, ‘억까’라는 신조어가 사람들의 입에서 새롭게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까다(억지스럽게 비난하다)’ 혹은 ‘억울하게 까이다(억울한 일을 당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다양한 상황에서 심심치 않게 쓰이곤 한다. ‘억까’라는 단어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쓰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이 단어,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단어의 매력은 무엇일지, ‘억울함’에 관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인의 마음관
그 전에 먼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마음’이라는 단어를 톺아보자. 한국어 ‘마음’은 서양과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다. 흔히 마음은 영어 단어 mind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인지, 생각과 같은 정신적인 능력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어 마음은 사람의 지(知), 정(情), 의(意)의 움직임의 근원으로 정의된다. 한국인은 이 ‘마음’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유추하고 경험에 의미를 부여한다. 즉 한국인의 마음은 자기 경험적이고, 자기 의식적이다.
한국인에게 마음 경험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며, 은유적이거나 직접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일상생활에서 무의식적으로 쉽게 써서 잘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이를테면 ‘마음이 가다’, ‘마음이 어지럽다’, ‘마음 속에 무언가를 간직하다’, ‘마음을 다잡다’, ‘마음을 나누다’ 등의 표현이 있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마음은 크게 기질성 마음, 느끼는 마음, 주인성 마음으로 분류된다.
기질성 마음은 개인이 갖춘 성격, 기질, 가치관 등의 개인적 특성과 더불어 지식, 도식, 지각 및 인지적 특성을 가리킨다. ‘마음 가는 대로 하다’에서 이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느끼는 마음은 사건이나 자극으로 인해 일어나는 내적인 마음 상태로서 대상이나 상황으로 인한 정서, 인지, 표상, 도식 등을 모두 포괄한다. ‘마음이 어지럽다’에서 느끼는 마음으로 쓰인다. 마지막으로 주인성 마음은 마음의 주인인 개인이 주관하고 행사하는 자의적인 마음을 뜻한다. 이때의 마음은 개인의 행위를 관장하고 통제하는 주재성과 자의성을 가리킨다. 즉 주인성 마음은 ‘의지(意志)’와 가깝다. ‘마음먹다’와 같은 표현에서 주인성 마음이 드러난다.
마음 경험
서구 문화에서는 모든 것을 제3자의 입장에서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달리, 한국 문화에서는 사건을 직접 겪은 1인칭, 당사자로서의 경험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에게는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이 큰 의미를 갖는다. 한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나’다. ‘내’가 어떤 것을 경험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가 관건이다.
이와 같은 개념을 ‘마음 경험’이라고 부른다. 마음 경험은 개인의 주인성 마음이 관여되어 발생하거나, 주인성 마음이 작동되어 겪게 되는 경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음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바꿔 말하면 특수하다.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은 당사자에게는 무엇보다 진실된 것이다.
억울
조세호가 말한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가요?!"는 억울함이 묻어 나온다.
주인성 마음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 바로 ‘억울함’이라는 정서다. 억울이란 억눌리고 침울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보통은 영단어 ‘depression(우울)’으로 번역되지만, 한국인의 ‘억울’은 ‘우울’과는 전혀 다른 현상과 감정으로 여겨진다.
최상진(2000)은 억울 혹은 억울한 마음을 자신이 부당한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에 대해 수용하기 어려운 마음이라고 정의했다. 그에 따라 억울함을 하나씩 뜯어보면, 먼저 억울한 마음이 존재하려면 ‘피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피해 당사자는 물론 ‘나’이며, ‘내’가 그 피해의 성격을 부당하다고 지각할 때 정서가 발현된다. 즉 타인이 보기에 객관적이거나 간주관적으로 피해가 어떻든 간에, ‘내’가 피해를 수용하는 데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억울하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억울함은 ‘나’의 마음, 즉 본심이나 의도, 능력과는 상관없이 부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에 활성화되는 분노, 당황, 답답함 등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억울함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으로 발생하지만, 그 상황에 대한 이차적인 해석으로 심화 및 지속된다. 이때 해석은 ‘나’, 즉 자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보통 그것은 ‘나’의 생각, 기대, 예상, 의도, 계획, 그중 무엇과도 관련이 없는 일인 경우가 많다. 꿈도 못 꿨던 일이다. 한눈에 보기에 그 일은 썩 좋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빠 보인다. 고난이다.
이렇게 해석한 뒤에 떠오르는 감정이 억울함이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하고 외치는 감정이다. 실제로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이유가 궁금하고, 하필 그 ‘일’이 발생했을까 당황스럽고 분노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하필 ‘나’에게 그 일이 일어났냐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아니 어쩌면 고난과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이에게, 평범한 우리네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일 수밖에 없다.
마음의 표현과 번역
억울의 사회적 표상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억울함에 대해 일반적이며 효과적인 대처는 표현하는 것이다. 억울함을 느끼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를 말하고 토로하며 해소해야 한다. 억울함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특수한 감정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타인에게 말하고 표현하고 전달해야만 바르고 건강하게 대처할 수 있다.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생긴다면, 그런 마음이 든다면 꽁꽁 싸매어 두기만 하지 말고 마음껏 표현해보자.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수다로, 혼잣말이나 일기장의 글로 표현해보자. 참고 쌓아 두기만 하면 병이 된다. ‘화병(火病)’이라는 것도 억울함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한국인 고유의 문화적 증세다. 억울함도, 화병도, 지극히 한국적이다.
때로는 외국인의 시선에서 생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한국인의 마음, 즉 생각과 감정의 번역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나 억울해!"라는 문장은 영어로 "It’s unfair!"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부당해!" 혹은 "그것은 불공평해!"라는 문장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영어의 초점은 ‘내’가 아니라 타인 혹은 외부의 상황에 있다.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말 그렇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는 한다. 재난이 일어나고 사고를 겪는 것, 하다 못해 질병에 걸리는 것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의 탓도, 나의 책임도 아니다. 너무 억울하고 이 상황이 버거워서 마음이 어렵다면, 상황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 일이 일어난 것은 ‘나’ 때문이 아니다. 그저 부당하고, 불공평한 상황이 일어났을 뿐이다. 그렇게 ‘나’의 억울한 마음에 작게나마 위안을 얻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저 지극히 한국적인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참고문헌
1. 한성열, 심경섭, 한민, 이누미야 요시유키. (2015). 문화심리학: 동양인, 서양인, 한국인의 마음. 학지사
※ 심리학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한국심리학신문(The Psychology Times)
에 방문해서 확인해보세요!
※ 심리학, 상담 관련 정보 찾을 때 유용한 사이트는
한국심리학신문(The Psychology Times)
※ 심리학, 상담 정보 사이트도 한국심리학신문(The Psychology Times)
※ 재미있는 심리학, 상담 이야기는 한국심리학신문(The Psychology Times)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mesamis15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