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은
[한국심리학신문=전성은 ]
사진 출처: 테세우스의 배 : 네이버 블로그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테세우스가 타던 배는 항해를 이어가면서 낡은 판자를 하나씩 교체했다. 긴 세월이 지나 결국 모든 부품이 새것으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 불렀다. 모든 게 바뀌었는데도, 왜 같은 배라고 생각했을까?
사실 이 질문은 우리 마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람은 매일 조금씩 변한다. 취향도 달라지고, 말투나 생각, 함께하는 사람도 바뀐다. 그런데도 우리는 변함없이 스스로를 ‘나’라고 부른다.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지는 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마음을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에 비유했다. 물살은 멈추지 않고 계속 바뀌지만, 강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마음도 같다. 감정과 생각은 바뀌어도, 그 안에는 자신을 하나로 묶는 실 같은 것이 있다.
이 실을 연결해주는 가장 큰 힘은 바로 기억이다. 댄 맥아담스는 사람들이 각자의 기억을 모아 ‘나만의 인생 이야기’를 만든다고 보았다. 과거의 작은 추억부터 오늘 SNS에 올린 사진 한 장까지,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든 조각이다.
결국, 나의 역사는 어제의 사소한 감정 하나에도 이어져,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계속 이어진다.
익숙한 장소가 주는 힘
변화는 때로 불안을 동반한다. 이때 마음을 붙잡아 주는 것은 익숙한 장소다. 누구에게나 마음속 한두 군데쯤 ‘나만의 장소’가 있다. 학창 시절 매일 앉았던 교실 뒷자리, 가끔 찾는 단골 카페, 오래된 골목길. Altman와 Low는 이를 ‘장소 애착’이라 불렀다.
사람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익숙한 장소 하나로 정체성을 다잡는다. 고향집 마당, 다니던 학교 운동장. 그런 곳에서 우리는 변함없는 나를 다시 만나게 된다.
부서지고 다시 이어 붙는 자아
신경심리학자 폴 브록스는 『Into the Silent Land』에서 자아를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뇌와 기억이 빚어내는 임시적 이야기로 설명했다. 직업이 바뀌고, 관계가 끊겨도, 큰 상실이 와도 사람은 새로운 조각을 덧대며 자신을 다시 세운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청소년기에 정체성이 가장 크게 흔들린다고 봤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그것은 계속 새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결혼, 이별, 이직, 부모가 되는 일처럼 인생의 큰 전환점마다 사람은 또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다시 구성한다. 그 과정이 불안할 때도 있지만, 결국 우리는 변화 속에서도 나로 살아간다.
익숙함 속에서 이어지는 나
사람이 바뀌어도 자신을 같은 존재라 여기는 것은 안정감을 주는 마음의 작용이다. 익숙한 이야기를 붙잡을수록 마음은 덜 흔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앨범을 꺼내 보고, 잊고 지낸 친구를 만나며, 익숙한 거리를 다시 걷는다.
모든 판자가 바뀌었지만 테세우스의 배는 항구에 묶인 이름 덕분에 여전히 같은 배였다. 우리도 그렇다. 기억과 공간, 관계가 바뀌어도 우리는 같은 이름을 지닌다.
오늘의 나는 어제와 다르다, 그러나 같다.
결국, 테세우스의 배는 지금도 떠 있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잊힌 기억이 있으면 새 기억이 자리를 채우고, 멀어진 관계가 있으면 또 다른 인연이 그 빈자리를 메운다. 그렇게 조금씩 바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살아간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그 질문에 답하려 애쓰는 순간들이, 사실은 나를 다시 붙잡아 주는 힘이 된다. 마음이 흔들릴 땐 늘 같은 풍경 하나, 낡은 사진 한 장이 나를 붙잡는다. 테세우스의 배는 철학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우리 마음의 이야기다.
오늘 당신은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새로 붙였는가. 변화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여전히 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새로운 조각을 더하며 살아갈 것이다.
출처
1) Altman, I., & Low, S. M. (1992). Place Attachment. New York: Plenum Press.
Broks, P. (2003). Into the Silent Land: A Guide to the Christian Practice of Contemplation. London: SPCK Publishing.
2) Erikson, E. H. (1968). Identity: Youth and Crisis.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3) James, W. (1890).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New York: Henry Holt and Company.
4) McAdams, D. P. (1993). The Stories We Live By: Personal Myths and the Making of the Self. New York: Guilford Press.
※ 심리학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한국심리학신문(The Psychology Times)
에 방문해서 확인해보세요!
※ 심리학, 상담 관련 정보 찾을 때 유용한 사이트는
한국심리학신문(The Psychology Times)
※ 심리학, 상담 정보 사이트도 한국심리학신문(The Psychology Times)
※ 재미있는 심리학, 상담 이야기는 한국심리학신문(The Psychology Times)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jse4726@naver.com